한 정치인이 있다. 어릴 때는 유달리 책을 좋아하여 하루에 두서너 권 읽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그 덕에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의학을 전공했지만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들고 가꾸기를 좋아했고, 의사가 된 뒤에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져 살다 컴퓨터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그 백신을 바탕으로 IT기업을 창업하였고 많은 고생과 노력 끝에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그가 어릴 때부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반말하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는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그도 부부지간은 물론이고 학생이나 직원에게도 가리지 않고 존댓말을 쓴다. 그가 국민에게 사랑받고 신뢰받았던 가장 큰 이유가 은연중에 이런 성품이 드러났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성품으로 보아 그에게도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는 인식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그가 시민단체 출신이어서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사람에게 후보를 양보한 순간이 그의 성품이 가장 빛났던 때였을 것이다. 구태가 만연한 정치판에서 시민사회를 우선에 두는 단체장이 탄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한 주역 중 하나가 그였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정치가로서 그는 자신의 여러 장점 중 다른 것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그는 그가 사랑받는 이유가 성공한 학자, 미국에서 수학한 전문경영인, 성공한 IT기업인, 명문대학의 교수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판단한 듯하다. 이런 명성도 당연히 인기의 비결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스펙’이 비슷한 인재를 고르라고 한다면 한두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저변이 그렇게 빈약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유능한 인재, 엘리트가 부족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이 국민에게 사랑받을 만한 초엘리트인데도 지지도가 나날이 추락하는 것이 추악한 정치판의 협잡 때문이라 여기고 구태의연한 정치기술로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한 듯하다. 하지만 그에게 예전부터 호의와 우려와 의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판단해보자면 시쳇말로 ‘셀링포인트’를 잘못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호의를 품었던 이유는 엘리트이면서도 따뜻한 성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즉, 그에게 우려와 의심을 거두기 어려웠던 이유는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유능한 전문가, 학자, 관료 따위를 아우르는 엘리트는 산업화시대의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과거의 유물이기도 하다. 단언컨대 엘리트가 도드라지는 사회는 더는 진보할 수 없다. 그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큼 일반 대중, 마을의 주민도 중요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며, 이른바 엘리트도 그런 구성원의 하나라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그래야 복잡한 여러 사회문제를 공동체의 연대와 협동으로, 더 나아가 집단지성으로 풀어나갈 길이 생긴다.
바른미래당의 안철수 후보는 지난 5월 29일 친히 기자회견을 열어 “7년 전 시민단체 대표에게 서울시장 출마기회를 양보했다. 그런데 그분은 시장이 된 후에도 시민단체 대표의 모습이었다. … 그분은 돈은 많이 들어가는데 시민 삶을 바꿔주는 건 없는 호화판 소꿉놀이처럼 시정을 운영했다.”라고 상대 후보를 비판하였다.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참을 곱씹어봤다. 요지는 시민사회의 방식은 지방자치에 어울리지 않으며 그 이유는 소꿉놀이와 같이 전문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민사회는 아마추어라는 말씀이 되겠다. 시민들의 후원으로 시민들과 더불어 연구를 이어가는 것에 막중한 의무감과 높은 자긍심을 지니고 터라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발언은 더욱 압권이다.
“시청 주변은 32조 원 예산을 따먹으려는 세금 사냥꾼이 득실거린다. … 서울시청 6층에 시장실이 있는데 같은 층에 시민단체 사람들이 고위공무원으로 와 있다. 소위 ‘6층 외인부대’이다. 제가 시장이 되면 6층부터 정리하겠다.”라는 발언에서 그가 왜 지지도를 계속 잃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다. 모든 내용과 뉘앙스가 문제투성이지만 가장 문제인 것은 난데없는 ‘세금 사냥꾼’ 비판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두기 위해 애매하게 하는 게 정치화술이니 괜한 오해라 할지 모르겠으나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 발언 취지로 보아 ‘세금 사냥꾼’이란 시민사회가 이런저런 보조금을 노린다는 비판인 듯하다. 즉, 이전보다 활발하게 이뤄진 사회적 경제나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일반 주민이 주체인 공모사업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 세 명이 모이면 공모할 수 있으니 ‘소꿉놀이’ 쯤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공동육아, 이웃만들기, 마을축제, 행복한 골목만들기, 공동체 공간 가꾸기 등 주민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벌여보겠다는 사업에 공공에서 지원해주는 예산은 모임이나 사업 하나당 보통 1년에 2~5백만 원 수준이다. 활동에 필요한 부족한 자원은 오롯이 마을공동체의 몫이다.
마을주민 한 사람이 들이는 평균적인 노력을 구체적인 연구결과로 살펴보면, 모임이나 사업을 꾸릴 때는 월간 16시간, 콘텐츠나 서비스를 공동체에 제공할 때는 월간 1시간,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참여할 때는 월간 2시간, 공동작업이나 활동을 할 때는 월간 8시간, 공동체공간을 운영할 때는 월간 49시간을 들인다. 목2동을 사례로 살펴보니 마을주민들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들인 시간은 총 48,714시간이었다. 마을살이에 값을 매길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으로, 시간당 인건비를 1만 원으로 잡아도 4억9천만 원에 달한다. 이 기간에 공공에서 지원된 금액은 1억2천5백만 원이며, 1년에 2천만 원쯤 된다.
안철수 후보가 기업가 출신이니 잘 알겠지만, 1억 원 지원해서 최소한 5억 원어치의 주민참여를 이끌었으면 남는 장사를 한 정도가 아니라 대박인 셈이다. 물론 마을공동체 활성화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는 따져보지도 않았는데도 이 정도이다. 이런 성과는 서울시가 단순히 돈을 지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연대와 협동과 자치에 대한 열망을 지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민들이 모여서 ‘소꿉놀이’ 한다고 비아냥대지만, 주민분들은 서로 모여 마을공동체가 처한 여러 어려움을 어떻게 같이 해결해나갈지 고민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제발 그렇게 심각하게 정색하지 말라고 만류를 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동체의 특성이고 힘이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와 도시재생의 기반이 되는, 더 나아가 인간소외라는 현대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마을공동체 활성화이고 주민자치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사회진보는 엘리트의 점잖은 말장난이 아니라 주민들의 작은 발걸음으로부터 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6월 4일 4층 상가건물이 무너진 사고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안철수 후보는 “건물 벽에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주민들이 안전해지겠나. 재건축, 재개발 문제도 주민 안전이 가장 최우선이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당연히 안전이 중요하다. 그런데 솔직히 보수 후보들이 재건축이나 재개발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것은 개발이익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것 아닌가?
박사 논문을 쓰면서 서울시의 주택재개발사업이 어떤 요인에 의해 활성화되는지 살펴본 적이 있다. 원리원칙대로라면 가장 낡고 오래된 주거지, 주거환경이 열악한 주거지부터 개발이 이뤄져야겠지만 실제로는 정비의 필요성이 다른 곳보다 적음에도 개발이익이 큰 곳부터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정말로 열악하고 정비가 시급한 주거지는 수십 년 동안 방치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택재개발사업이 도시계획사업임에도 민간개발사업처럼 추진되기 때문이다. 진짜 ‘예산 사냥꾼’은 개발이익에 눈이 멀어 지금도 ‘개발’을 외치는 사람들일 것이다.
건물붕괴 사고를 접하며 처음 든 생각은 ‘지은 지 몇십 년 되지도 않은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지는 게 과연 정상적인 나라일까?’라는 것이었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은 관리에 따라 백 년도 넘게 쓸 수 있다. 애초에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이거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건물일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아파트 주택재건축사업의 기준을 통과하려고 일부러 관리를 소홀히 하는 단지가 있다는 소문이 떠오른다.
사회를 올바르게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있다면 이런 개발주의를 비판하는 게 우선일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관계도 없는 ‘해바라기 그리기’ 운운하며 상대 후보 비판에 여념이 없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더욱이 그 비판이 향하는 곳은 결국 상대 후보가 아니라 오늘도 묵묵히 마을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민들이니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존댓말만 쓴다고 상대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작은 목소리와 작은 행동의 중요함을 깨닫게 될 때 다시 국민의 신뢰를 받는 정치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동감합니다!
한국은 대부분 대졸자 입니다. 어찌됬건 공부하면서 16년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지역주민이 주도하는 일이 결코 한두사람의 엘리트의 생각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 정말 시작하기 좋은 때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