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도시재생이라는 값비싼 정책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5년간 전국 500곳에 무려 50조 원을 쏟아 붓는다니 걱정이 앞선다. 돈도 돈이지만 해마다 100곳씩 선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지방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마냥 미뤄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서둘러 목표부터 정하고 밀어붙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500가지의 청사진이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기왕에 돈을 쓰려면 제값을 할 수 있게 제대로 써야 한다. 도시마다 커다란 미술관을 짓고 첨단 산업단지를 꾸민다고 관광객과 기업이 몰려들 리 없다. 모든 지자체가 인구가 늘어나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헛된 바람이다.

 

누가 그린 청사진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궁극적 목표는 주민의 삶”이라는 국토교통부 장관의 말이 힘을 가지려면, 주민이 함께 그린 청사진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이 함께 바꿔가야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지 않으려면 물을 붓기 전에 독의 바닥부터 살필 일이다.

 

영국 리버풀(Liverpool)의 톡스테스(Toxteth) 지역에 자리한 ‘그랜비 거리(Granby Street)’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를 되살리고자 주민들이 오랜 세월 끈질기게 싸워온 곳이다. 그리고 20여년 만에 비로소 꿈을 이뤄가고 있다. ‘그랜비 거리’ 주민들이 걸어온 길었던 여정을 돌아보기로 하자.

 

리버풀의 흥망성쇠와 그랜비 거리

 

리버풀은 잉글랜드의 북서부, 바다에 닿아있는 도시다. 그룹 비틀즈의 고향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한때는 유럽과 세계를 잇는 관문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붙잡힌 흑인 노예들이 긴 항해 끝에 첫 발을 내딛던 낯선 땅이었고, 1840년 세계 최초의 증기선이 이곳에서 출항한 뒤엔 신대륙으로 건너가려는 유럽인들이 몰려들던 곳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대영제국은 리버풀이 있어 가능했다’는 말이 생겼을까.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리버풀도 엔진을 달았다. 1801년에 7만 8000명이 모여 살던 도시가 100년 뒤인 1901년엔 68만 5000명이 북적이는 ‘대영제국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바다로 이어진 머지(Mersey) 강에서 겨우 2km 떨어진 ‘그랜비 거리’도 리버풀과 함께 성장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100년도 더 된 나지막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선 이 거리엔 한때 100여 개의 가게들이 몰려있을 만큼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음식과 물건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도 리버풀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자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리버풀도, 그랜비 거리도 조금씩 활기를 잃어갔다. 산업구조의 변화도 한몫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항구도시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고, 경기침체가 이어지면서 실업률도 가파르게 치솟았다. 급기야 1981년 폭동이 벌어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상점들도 문을 닫고, 빈집이 늘어갔다. 절망감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 절망의 고리를 끊고자 주민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1993년 그랜비주민협의회(Granby Residents Association)가 꾸려졌다. 이들의 바람은 소박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거리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지역의 빈 공간들을 어떻게 다룰지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내내 파괴는 계속되었고, 결국 그랜비 거리에서 옆으로 뻗어나간 4개의 작은 길들인 비콘스필드(Beaconsfield st.), 케언스(Cairns st.), 저민(Jermyn st.), 듀시(Ducie st.)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차 2대가 겨울 지나다닐 수 있는 이 4개 길의 길이를 모두 더하면 900m 남짓이다.

 

주민협의회는 리버풀 시의회를 끈질기게 설득해 이 ‘그랜비 4개 길(Granby Four Streets)’에 있는 집들은 철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지역을 되살리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고, 빈 집들은 다시 몇 년간 그대로 방치된다. 2002년 영국 정부가 무려 22억 파운드(약 3조 400억 원)을 들여 빈집을 매입한 뒤 철거하는 ‘주택시장 재건(HMR, Housing Market Renewal)’ 프로그램을 도입하자 시가 다시 철거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민협의회는 물러서지 않았다. 힘든 싸움이 계속되었고, 주민들도 지쳐갔다.

 

꽃을 심는 마음으로 희망의 씨를 뿌리다

 

주민들은 작은 일부터 해보기로 했다. 거리를 꾸미는 일부터 시작했다. 커다란 통에 꽃을 심어 거리 곳곳에 놓았고, 건물 벽엔 담쟁이를 올렸다. 유리가 깨져나가 철판으로 덧댄 창엔 커튼과 꽃병을 그려 넣었고, 봄과 여름엔 달마다 ‘거리 시장(Street Market)’도 열었다.

 

“우리는 이곳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직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다.”

 

그즈음 ‘주택시장 재건’ 프로그램은 중단되었고, 주민들은 2011년 11월 ‘그랜비포스트리츠 공동체토지신탁(Granby Four Streets Community Land Trust)’을 꾸렸다. 주민이 직접 지역의 자산을 맡아 되살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시의회는 입찰을 통해 민간 건설업체에 일을 맡기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주민들과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토지신탁(CLT, Community Land Trust)

지역 주민들에게 집과 공동체 시설을 적정한 가격에 영구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만든 공동체 기반 비영리 조직으로, 주로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한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신탁 받되, 토지 위에 세워진 건물의 가치는 분리한다. 건물의 소유주에게 장기로 토지를 임대(lease)하거나, 알맞은 가격에 세(rent)를 준다. 토지는 무상으로, 또는 낮은 가격에 제공을 받거나, 필요하면 시장가격에 사들이기도 한다. 일정한 기간이 지나 건물 소유주가 건물을 되팔려 할 때도 가격을 고정시킴으로써 영구적으로 적정한 가격에 건물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토지의 가격 상승도 억제한다.

‘그랜비포스트리츠 CLT’는 지역 주민과 관심을 가진 지역 내 단체의 성원들 약 1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성원이 되려면 1파운드로 주식을 사야 한다. 의결권은 1주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칙을 따른다. 8명(12명까지 가능)의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이사회의 관리ㆍ감독을 받으며 이사회는 연례 총회에서 뽑는다.


 

2012년 12월, 주민들은 시의회에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심을 가진 주택조합(Housing Association, 싼 가격에 사회적 주택을 공급하는 민간 비영리 조직)들과 자금을 마련해줄 것 그리고 몇몇 자산들을 공동체토지신탁이 맡아 되살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 두 주택조합 LMH와 Plus Dane Housing이 나섰고, 여러 기금들로부터 1400만 파운드(약 200억 원)를 모았다. 어느 사회적 투자자가 공동체토지신탁에 50만 파운드(약 7억 2000만 원)를 무이자로 빌려주기도 했다.

 

시가 소유한 빈 집을 단 돈 1파운드(약 1400원)에 내놓은 리버풀 시의 파격적인 정책(Houses for one pound)도 한몫 했다. 빈 집을 고쳐서 5년간 거주하는 조건이었다.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을 감안하면 반값 정도에 내 집을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21년이 걸렸다. 그리고 2014년, 110채에 대한 되살리기가 시작되었다. 공동체토지신탁이 맡은 집은 13채였다. 6채는 팔았고, 5채는 세를 줬다. 나머지 2채는 집으로 되살리기가 힘든 상태여서 지역 공동체가 함께 쓸 공간으로 꾸몄다. 한 곳은 유리지붕을 올려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겨울 정원(winter garden)’으로, 다른 한 곳은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다양한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스튜디오와 방으로 꾸몄다.

 

주민이 도시를 만들어 간다는 것

 

2014년 4월, 100명도 넘는 주민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역을 되살릴 방안을 찾는 자리였다. 리버풀 시의회와 주택조합들, 건축가 그룹도 참석해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들려주며 주민들의 궁금증도 풀어줬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그랜비 거리’의 미래를 커다란 지도에 자유롭게 그려 넣었다.

 

“그랜비는 아주 특별한 곳으로, 공동체가 강하고, 준비돼있으며, 미래에 대해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 시의회가 모두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도록 열린 접근을 추구하는 것을 환영한다.”

– 공동체토지신탁 사무총장 메튜(Matthew)

 

“우리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협력해 나가면서 더 나은 발전을 가져다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모두에게 계획에 대해 논의할 기회를 주고 더 활발한 토론을 이끌 것이다.”

– ‘플러스 데인 하우징’ 주택조합 디렉터 루이스(Louise)

 

건축가 그룹인 어셈블(Assemble)과 주민들이 함께 한 ‘그랜비 워크숍(Granby Workshop)’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들은 버려진 집에서 나온 깨진 돌과 불에 그을린 나무를 다듬어 탁자와 의자, 작은 문고리를 만들었다. 낡은 타일에 새로운 문양을 넣고 독특한 질감의 전등갓과 접시도 구워냈다. 쓸모없어 보이던 온갖 재료들을 모아 세상에 하나 뿐인 예술작품으로 빚어낸 것이다.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2015년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 미술상인 ‘터너 예술상(Turner Art Prize)’ 수상으로 이어졌고, 지금은 지역 비즈니스로 성장해가고 있다(https://granbyworkshop.co.uk/).

 

‘거리 시장’은 매달 첫 토요일마다 열린다. 12월엔 크리스마스 시장을 크게 연다(1월은 쉼). 골동품과 중고의류에서부터 자전거, 예술품, 공예품, 독특한 그림들까지 다양한 상품들이 판매되며, 빵과 케이크를 비롯해 여러 지역과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최근엔 시로부터 그랜비와 케언스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자리한 네 개의 빈 가게들을 넘겨받기로 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창조적 기업에게 맡겨 공동체와 지역 경제를 되살릴 기회로 삼을 생각이다. 또 하나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또 청년층의 실업률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다양한 지역 재생 프로젝트가 지역 청년들에게 직업 훈련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리버풀 시도 지역 재생으로 수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년 넘게 버려진 집들을 되살리는 데 드는 비용 이상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조직과 사람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위험을 나눴고, 창조성과 헌신으로 가치를 더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영국을 대표하는 사회 혁신 기관 네스타(NESTA)는 2016년 ‘그랜비포스트리츠 공동체토지신탁’을 ‘뉴 레디컬스(New Radicals)’ 가운데 하나로 뽑았다. 영국의 ‘실용적 근본주의(practical radicalism)’ 전통을 되살릴 만한 본보기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랜비는 회복력을 가진 공동체이지만, 여전히 가혹하고 제한적인 사회 경제적 현실의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외부 조건이 나아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지난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얻은 가장 큰 교훈으로, “지역 사회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려면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꼽았다. 또 “우리의 가장 옳은 선택은 공동체의 소유와 집단적 실천 행동, 그리고 새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의지에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앞으로 주민들은 공동체토지신탁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그리하여 5년 안에 공공의 지원으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으로 거듭나려 한다. 네 개의 상점을 되살리는 일은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사회 혁신, 특히 지역 사회를 바꾸는 데서 주민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해결해야 할 과제와 문제를 주민이 가장 잘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보다 지역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는 이를 찾기란 어렵다.

 

“시민들은 이러한 도전을 가장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시민은 그들 삶의 전문가다.”

– 데이비스와 사이먼(Davies&Simon)

 

또 앞서 살펴봤듯 지역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대개 오랜 시간을 두고 새로운 환경과 문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새로운 도시는 새로운 건물이 모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민들 스스로 익숙했던 생각과 행동을 조금씩 바꿔나갈 때 비로소 도시도 거듭날 수 있다. 그러려면 주민이 함께 해법을 만들고 운영하며,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랜비 거리’의 주민들이 20년 넘는 세월을 끈질기게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바닥을 단단히 다지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