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베르타(Berta)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 베로나(Verona)에 산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던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장애가 있어 오십이 다 되도록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카를라(Carla)는 수년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아들과 함께 살 집을 구하지 못해 벌써 몇 달째 떨어져 살고 있다. 정부가 주는 아주 적은 수당으론 이들이 더 나은 내일을 꿈꾸기가 쉽지 않다.
이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이웃들이었다. 같은 도시에 살던 안나(Anna)와 그의 친구들. 그들은 2012년 윤리적인 패션 기업을 만들기로 하고 협동조합을 꾸렸다. 이름 하여 ‘Progetto Quid(프로젝트 퀴드)’. ‘quid(퀴드)’는 라틴어로 ‘something more’, 즉 ‘더 나은 무언가’라는 뜻이다. 이들은 남들이 입었던 브랜드 의류를 모아 업사이클(upcycle) 패션 브랜드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베르타와 카를라처럼 장애를 가졌거나 폭력과 성매매 피해, 또는 범죄나 마약에 노출되었던 여성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베네토(Veneto) 주의 패션기업들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다행히 패션 기업인 칼제도니아(Calzedonia) 그룹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알아봤다. Calzedonia는 고급 옷감을 기부하고 비어있는 가게를 제공하기로 했다. 안나는 “이 운명적 만남이 도약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윤리적 생산과 경제적 이익, 두 마리의 토끼를 잡다
‘프로젝트 퀴드’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EC)가 2013년부터 해마다 개최해온 ‘유럽 사회 혁신 대회(European Social Innovation Competition)’에서 2014년 3개 팀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이 해에는 무려 1250개의 프로젝트가 열띤 경쟁을 벌였다.
“장애 때문에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이 일은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느끼게 한다.”
“아들과 살 집을 마련해서 함께 살고 싶다. 그래서 이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베르타와 카를라의 말이다. 이곳에선 그녀들과 비슷한 처지를 가진 7개 나라에서 온 70여 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벼랑 끝에 서있던 이들에게 ‘퀴드’가 내민 손은 일자리보다 ‘더 나은 무언가’다.
그래서 그들은 온 마음을 다 해 옷을 만든다. 그리고 다행히 그들이 만들어낸 값어치를 소비자들도 알아봐주고 있다. 사람들은 좋은 품질의 옷(감)을 업사이클링 한 제품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 삶의 기회를 얻은 이들이 한 땀 한 땀 직접 손으로 만든 옷이라는 점에 끌려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들이 만든 옷은 베로나(Verona), 메스트레(Mestre), 볼로냐(Bologna), 바사노 델그라파와 바제세(Bassano del Grappa and Vallese) 등 5개 직영매장과 65개 파트너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2017년에는 ‘유럽 여성 혁신가 상(EU Prize for women innovators)’에 뽑히기도 했다.
공유와 협력으로 장애인에게 새로운 길을 열다
프랑스에 사는 샤를로트 드 빌모(Charlotte de Vilmorin)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줄곧 휠체어를 타야 했다. 성인이 된 그녀는 2015년 여행을 가기 위해 휠체어로 탑승이 가능한 차량을 알아보다 어마어마한 비용에 놀라 포기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해법을 찾기로 마음먹는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녀는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개조 차량(adapted cars) 공유 플랫폼 ‘Wheeliz(휠리즈)’를 열었다.
휠체어를 탄 채로 차량에 탑승하려면 널찍한 공간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어야 하고, 휠체어를 고정시킬 수 있는 안전장치도 필요하다. 휠체어를 탄 채로 운전을 하려면 필요한 것들이 늘어난다. 프랑스에는 장애인, 또는 그 가족이 소유한 개조 차량이 10만 대에 달한다고 하니 나눠 쓰기엔 모자라지 않다. 비용도 일반 대여 업체의 것에 견줘 3분의 1에 지나지 않고, 차를 빌려주는 쪽도 새로운 수입이 생기니 모두에게 이롭다. ‘휠리즈’는 보험료를 포함해 대여료의 30%를 가져간다.
처음엔 모금으로 2만 1,000유로(약 2700만 원)를 모아 60대의 차로 시작했다. 반나절이나 하루, 또는 일주일 간 빌릴 수 있도록 했다. 2년 뒤인 2017년에는 등록 차량이 10배인 650대로 불었고, 사용자 커뮤니티엔 5500명이 모여들었다. 100만 달러의 투자도 받았다.
“뭔가 옳은 일이 이뤄지길 바란다면, 당신이 직접 하는 게 최선이다.”
‘휠리즈’를 만든 그녀의 말이기에 울림이 더 깊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사회 혁신 ‘지도’가 필요하다
가난과 불평 등, 고령화와 청년 세대의 기회 상실,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 인종·계층 간 갈등.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인류는 풀리지 않은 숱한 문제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정부도 시장도 이들 문제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 있다. 이탈리아의 안나, 프랑스의 빌모가 그렇다. ‘더 나은 무언가’를 꿈꾸며 열심히 옷을 만드는 베르타와 카를라도, ‘휠리즈’에 자신의 차를 등록하고, 또 차를 빌리는 수백 수천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 새로운 해법을 찾아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이러한 흐름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른다.
“사회혁신은 사회적 필요를 다루는 새로운 접근이다. 수단과 목적이 모두 사회적이어야 한다. 수혜자를 개입시키고 참여시키며, 그들이 힘과 자원에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돕는다.”
유럽의 6개 연구 기관들이 공동으로 내린 사회 혁신의 정의다. 복잡해 보이지만 앞의 두 사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유럽은 일찍부터 사회 혁신에 관심을 두어 왔다. 세계 금융 위기를 겪은 뒤인 2009년엔 이미 사회 혁신이 유럽연합(EU)의 정책 아젠다로 격상되었고, 폭넓은 정책들과 프로그램, 기관들을 통해 주류로 자리 잡아 왔다.
“특히 사회 혁신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일으키고 일자리를 지키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어 더욱 중요하다.”(조제 마누엘 바호주(José Manuel Barroso)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BEPA Workshop on ‘Europe and Social Innovation’, 2009.1.20.)
유럽에선 여러 시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 혁신의 이론적·정책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TEPSIE), 또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도들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로 이끌어 갈 방법을 찾으려는 연구(TRANSIT)가 EC의 지원 아래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단계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사회혁신수석’이 만들어지고, 행정안전부가 ‘사회혁신추진단’을 꾸렸다. 물론 그동안 몇몇 지방정부나 정부부처, 민간에서 이룬 성과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넘어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에 사회 혁신이 의미 있는 흐름으로 자리 잡도록 국내외의 여러 사례와 이론들을 모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우리만의 길을 찾아보려 한다. 이 기획이 우리만의 길을 찾는 데 작은 주춧돌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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