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눈앞의 적은 분명했다. 1961년 5월 16일 헌정을 파괴하고 수십 년간 독재를 일삼고 있는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것이 분명한 목표였고, 달성했다.
얼마 전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의 긴박했던 순간을 담은 <1987>이 개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화)‘1987’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는 질문의 답”이라며 감회 깊은 관람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연말 연구원의 종무식을 겸하여 <1987>을 단체관람한 후 극장을 나서는데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만든 지금, 민중의 삶을 억누르는 부조리는 여전하지 않은가?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책임을 져야 하는 누군가가, 이를테면 봉건지주, 제국주의자, 인권을 유린하는 자본가, 파시스트나 독재자, 인종차별주의자 따위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 투쟁 대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햇빛도 들지 않는 좁고 눅눅한 고시원에서 하루하루 버티다 극빈층으로 늙어가야 할 2018년의 취준생이 탓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발 빠르고 똑똑한 기득권, 신자유주의자들이 먼저 한마디씩 보탠다. 기업활동을 방해하는 정부규제, 하는 일도 없이 돈만 축내는 공기업들, 제 잇속만 챙기는 귀족노조.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돈도 빽도 없는 네 부모, 좋은 일자리만 바라는 네 욕심’을 탓하라는 게 그들의 속마음 아니던가?
1918년, 때려잡아야 할 적은 명확했다. 무의미한 전쟁에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차르, 민중을 착취하는 귀족과 지주와 공장주들. 이들을 제거하는 혁명은 몇 개월 만에 완료되었다. 신체제 대 구체제, 노동자 대 자본가라는 명확하고 단순한 투쟁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 대신 자본을 관리한 국가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자본가의 최대의 적은 몰락했고, 유력한 용의자가 유유히 혐의를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걸 막기 어려워 보인다.
2008년, 신용등급이 낮은 주택저당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Subprime Mortgage)에 기반한 부채담보부증권(CDO;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베어스턴스, 컨츄리와이드, 리먼브러더스가 차례차례 파산하였다.
말이 좋아 ‘신용등급이 낮은’이지 금융수수료에 눈이 먼 은행이 말 그대로 ‘개나 소’나 다 대출을 해준 것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게 드러났다. 이 부실채권을 수천 개 모아서 마치 좋은 투자상품인 것처럼 꾸민 것이 CDO. 이런 CDO들을 묶어서 또 다른 CDO를 만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부실채권의 위험이 은행으로부터 투자기관에 이르는 전체 금융체계로 연결되었다.
투자자를 보호해야 할 신용평가사인 S&P와 무디스는 오히려 CDO가 안전한 투자상품이라고 평가를 해주었다. 미국의 금융감독기관들은 어처구니없는 이런 작태를 몰랐거나 모른 척 한 게 드러났다. 영화 <빅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기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만 5조 달러의 자산손실이 발생하였고,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집을 잃었다. 하지만 이 사태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사법처리된 금융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민중은 분노했지만, 그 대상은 막연히 월가로 대변되는 금융산업이었을 뿐 누구를 벌해야 하는지 분명치 않았다. 유럽에서는 애꿎게도 난민들이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설령 금융업계에 종사한 수백 명의 자본가를 법정에 세우고 처벌하였다고 하여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었을 거 같지는 않다. 그들이 운용한 자본은 또 다른 수많은 자본가로부터 헤지펀드 따위의 금융체계를 통해 조달한 것이었다. 혹시 은행에서 ‘○○펀드’라는 상품에 가입한 적이 있다면 경제위기를 불러온 ‘수많은 자본가’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발호와 이에 따른 극심한 양극화, 그리고 새로운 양상의 경제불황을 지켜보면서 분명히 잘못된 일이 발생했는데 과거처럼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마치 ‘실체가 없는 듯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 같은 상황이다. 적이 진화하여 교묘히 우리 사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회진보를 가로막는 부조리가 자본이나 신자유주의에 국한된 것도 아니니, 구체적으로 어떤 것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사소한 생활습관에서 정부 정책에 이르기까지 추궁해야 할 용의자는 무수히 많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추려도, 마트에서 점원에게 갑질을 하거나, 한남충이란 표현에 적개심이 들거나, 직원들이 일은 하지 않고 노닥거리는 거처럼 느껴지거나, ‘하여튼 요즘 것들은’ 이러며 혀를 찬다거나, 태극기를 들고 전철에 오르는 노인을 보며 꼰대라고 단정하거나,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대출제한 조치가 불만스럽거나, 민간자본을 활용하여 공공서비스나 저렴한 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정책이 그럴듯하게 여겨지거나, 마을공동체나 연대와 협동 또는 협치와 같은 움직임에 회의감이 들거나,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로 가게 매상이 줄 것이 걱정되거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규제완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되거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거나, 성역할이 고착화된 드라마를 보면서 별 문제점을 못 느낀다거나, 최저임금을 올리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 같거나, 법인세나 부동산보유세를 높여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는 정책이 무모하게 여겨진다거나, 세금으로 잘사는 집 아이들에게까지 급식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거나, 계약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여 어렵게 공채로 들어온 정직원과 같은 대우를 하는 게 불만이거나, 좋은 학교를 나왔으니 더 나은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거나, 내 집 옆에 임대주택이나 특수학교가 들어서는 게 싫거나, 맨날 싸움질만 하는 국회의원을 늘리는 것에 반대하거나, 큰돈 벌 수 있다는 증권가 찌라시에 눈길이 간다거나 한다면, 차분히 ‘내가 나의 적’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는 징후일 수 있다.
모두 ‘내 탓’이라고 얼버무리려는 건 아니다. 싸워야 할 대상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잘 드러나지 않으니, 안심할 때가 아니라고, 피곤하겠지만 늘 경계하고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그때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인식과 각오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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