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정이 결과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과정을 규정짓는다. 결과를 기준으로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역사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란 허구이거나 자기기만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혁명을 기술하는 것은 적지 않은 곤혹스러움을 안겨다준다. 러시아혁명의 최종 결과는 소련 붕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긍정적 평가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도 있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볼셰비키 혁명사’는 소련공산당이 자신들의 정통성 확립을 목적으로 기술한 것이었다. 다분히 권위주의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었다. ‘당파성’이라는 표현으로 그러한 접근은 철저히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모든 권위는 무너졌고, 당파성을 견지해야할 필요성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이 글은 기성의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 러시아혁명을 관통했던 여러 주제 중에서 엘리트와 민중 사이 관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지점은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는 본질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승리의 결정적 요인

1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은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촉발되었다. 혁명의 불꽃이 틔자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온 민중은 다투어서 짜르 궁전을 향해 몰려갔다. 궁전을 지키던 병사들이 시위대 편에 서면서 짜르 체제는 맥없이 허물어졌다. 더 이상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짜르가 물러나면서 자유주의적인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그로부터 혼란스런 정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수 세기에 걸쳐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 왔던 짜르 체제가 무너지자 그 어떤 세력도 정국을 주도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 소수 세력에 불과했던 볼셰비키로 불린 일단의 사회주의자 그룹이 무장봉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볼셰비키 승리의 요인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 냉정히 짚어 봐야할 지점이 존재한다. 과거 공식적인 소련공산당사는 볼셰비키 승리는 전적으로 최고 혁명 지도자 레닌의 탁월한 리더십과 조직노선의 결과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레닌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 안에서 당은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된 전위 조직이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당내에서 심각한 논쟁을 야기했고 결국 의견을 달리했던 멘셰비키와 완전 갈라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되는 전위당 노선은 이후 소수 엘리트들이 작심하면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사고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명백히 엘리트주의 과잉으로서 갖가지 후과를 낳았다. 식민지 조선 등에서는 수많은 엘리트들이 당 조직만 장악하면 세상을 한 손에 거머쥘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극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일사불란함을 자랑하는 레닌의 당 조직노선이 예측 불허의 혼란한 시기를 헤쳐 나가면서 최종 승리를 거머쥐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조직이 없었다면 볼셰비키 승리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제는 철저한 당 조직 중심 관점이 민중을 ‘대상화’하는 데 있었다. 당 조직 중심 관점에 따르면 민중은 볼셰비키 안내에 따라 비로소 깨우침을 얻고 혁명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묘사된다. 과연 그러한가? 보기에 따라 진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먼저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것과 달리 발전된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뒤늦게 산업화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국가 권력과 외국자본 힘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만큼 부르주아 계급의 자생성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은 짜르 중심의 국가 권력을 허물어뜨리는 한편 외국자본과의 연결 고리를 모조리 끊어 버렸다. 부르주아 계급이 기댈 언덕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틀어쥐고는 있었지만 정국을 주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럴만한 힘도 없었고 권위 또한 전혀 인정받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세 흐름에 떠밀려 이리저리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취약하기 그지없었던 기존 체제가 세계대전의 일격으로 붕괴하고 말자 그나마 있었던 문제 해결 능력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무엇에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민중은 오직 생존의 본능에 이끌리어 급진적인 행동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사이 공장위원회 설립을 통해 공장을 장악해 들어갔다. 오랫동안 농노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농민들은 체제 붕괴를 틈타 토지를 점거해 들어갔다. 병사들은 전쟁 수행 명령을 거부하고 대열에서 이탈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더불어 2월혁명이 발발한 지 얼 마 안 되어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의기구인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벌도의 권력 주체로 떠올랐다. 그 결과 케렌스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가 권력을 양분한 ‘이중권력 상태’가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은 볼셰비키를 포함해 그 어떤 혁명 세력의 지도 안내 없이 민중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속에서는 조직 기반이 아예 없었다.

민중이 급진적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은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볼셰비키의 최대 경쟁 세력이었던 멘셰비키는 그들의 공식에 갇혀 정국 흐름과 자신들을 갈라놓았다. 멘셰비키는 고전적인 2단계 혁명론에 입각해 해당 시기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서 자본주의 발전에 충실해야할 할 때라고 판단했다. 멘셰비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보았다. 멘셰비키는 그러한 입장에서 민중의 급진적 행동을 순리에 벗어난 경거망동으로 간주했다.

민중의 급진적 흐름과 자신을 일치시켰던 것은 거의 유일하게 볼셰비키뿐이었다. 민중이 볼셰비키에 적응했기보다 볼셰비키가 민중에 적응한 것이다. 레닌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볼셰비키는 ‘전쟁 중단’, ‘즉각적인 토지 분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볼셰비키의 슬로건은 민중 사이에서 강력하고도 광범위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곧바로 볼셰비키 당 조직의 급속한 확대로 이어졌다. 2월혁명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쳐 2천 명 수준에 불과했던 당원 수는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30만 명으로 불어났다. 말 그대로 폭발적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10월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 이름으로 무장봉기를 단행, 전광석화처럼 권력을 장악했다. 이로써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 궤도에 올라섰다. 취약하기 그지없었던 기존 체제가 세계대전의 일격으로 그 어떤 문제 해결 능력도 제시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세력이 갈피를 못 잡고 배회하고 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볼셰비키만이 민중의 급진적 흐름에 자신을 일치시킨 결과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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