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를 거치면서 산업화 진전과 함께 노동자 계급이 꾸준히 증가했다. 고삐 풀린 시장을 무대로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지배하면서 노동자 대중은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개선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극단적인 절망과 냉소, 허무주의였다. 예외적으로 대혁명 세례를 받은 프랑스 노동자들은 투쟁 열기로 들끓고 있었으나 그들 역시 즉자적이고 감성적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를 마르크스(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95)의 출현은 가히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예언서가 된 공산당선언

마르크스와 엥겔스 두 사람 모두 부와 출세가 보장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다. 마르크스는 성공한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엥겔스는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 경영 수업을 거쳤으며, 이후 영국 맨체스터에서 직접 기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청년 시절 급진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노동자 계급의 사상적 지도자로 변신했다. 천상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네 준 프로메테우스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프로메테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혹형을 겪었듯이 두 사람 역시 온갖 박해와 망명, 가난, 질병, 가난 등에 시달려야 했다.

마르크스가 30세 되던 해인 19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향후 자신들의 사상 행적을 예시한 기념비적인 공동 저작을 발표했다. 바로 국제 노동자 혁명의 출생증명서이자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요지를 담은 《공산당선언》이었다. 《공산당선언》은 초판 인쇄 당시 3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소책자에 불과했지만 역사적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근대 이후 영향력 면에서 이를 능가할 책자는 달리 없었다.

《공산당선언》의 첫 구절은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로 시작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선언》을 하나의 예언서로 받아들이도록 만든 구절이다. 《공산당선언》의 첫 장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선험적 문구로 시작된다. 부르주아 계급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역사적 필연임을 선언한 것이다.

《공산당선언》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반응은 냉소와 경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얼마 후 그들은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공산당선언》이 예고했던 대로 주기적인 공황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선언》은 거꾸로 노동자 계급의 가슴에 ‘혁명의 불길’을 지폈다. 《공산당선언》은 자본주의가 대공장으로 노동자를 집중시킴으로써 거대한 부대로 전환시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자본주의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으로 묘사한 이 구절 역시 액면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공산당선언》은 마지막을 선동적인 문구로 장식하고 있다. 이는 지지자들 사이에서 노동자 계급을 향해 던진 최후의 실천 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혁명 앞에 떨게 하라. 프롤레타리아는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공산당선언》은 현실의 복잡다기한 요소들을 배제하고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지자들로 하여금 극단적 판단에 이르도록 할 위험성을 안고 있었지만 강한 호소력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럼으로써 《공산당선언》은 역사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1948 유럽혁명

《공산당선언》의 마지막 구절인 만국의 노동자 단결하라는 세계혁명에 대한 절대적 지향을 표현한 것이었다. 기묘하게도 《공산당선언》이 발표되자마자 마치도 세계혁명이 발발한 것 같은 양상이 벌어졌다.

당시 유럽에서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곳은 대혁명 열기가 여전히 살아 있었던 프랑스였다. 유럽의 보수 정치를 대표했던 오스트리아 수상 메테르니히는 이를 두고 “파리가 재채기를 하면 유럽이 몸살을 앓는다.”라고 빈정거렸지만 상황을 진지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변함없는 혁명의 조국이었다.

프랑스는 대혁명의 성과가 눈에 띠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1846년 선거법 제정을 계기로 급격히 고조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선거법에 따르면 부유한 성인 남자로 구성된 3퍼센트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나머지 97퍼센트에 해당하는 노동자와 여성, 하층 계급은 완전 소외되어 있었다.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시점인 1848년 2월, 노동자 학생을 주축으로 한 반정부 세력은 파리 시가를 점령하고 실력대결에 돌입하였다. 52명이 살상되는 유혈 출동을 겪은 끝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반정부 세력이 승리한 것이다. 프랑스 2월혁명의 불길은 곧바로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2월 24일 프랑스에서 공화제가 수립된 이후 3월 2일에는 남서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3월 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에는 베를린, 3월 12일에는 빈, 그 직후에 헝가리, 3월 18일에는 밀라노 등 이탈리아에서 잇달아 혁명이 일어났다. 불과 몇 주일 만에 유럽의 10개국이 혁명에 휩싸였으며 그 과정에서 쓰러지지 않고 버틴 정부는 하나도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 지배 세력에 맞서 혁명에 적극 동참했다. 하지만 이들은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와 하층 계급의 폭발적 진출을 목도하면서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눈앞의 적보다 왼쪽의 적이 더 위협적이라고 느꼈다. 결국 부르주아 계급은 방금 전까지 혁명의 적으로 간주했던 봉건 세력과 손잡고 하층 계급을 향해 총 끝을 겨주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피비린내 나는 반혁명 광풍이 몰아쳤다. 당시 노동자 계급은 상황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1948년 혁명을 이끈 것은 다분히 급진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소시민 ‘인텔리켄챠’였다. 반혁명 광풍 속에서 혁명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죽음 아니면 망명뿐이었다.

1948년 유럽혁명을 비극적으로 마무리한 것은 도화선 역할을 했던 파리 노동자들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배신으로 혁명 실패가 확연해지고 있던 6월 무렵, 파리 노동자들은 봉기를 단행했다.(6월봉기). 어린 자녀를 포함한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노동자들은 평등한 재산권 분배를 외쳤다. 당시로서는 너무 앞서 나갔던 노동자들의 주장은 소시민 계층마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고립 무원한 상황에서 피의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수천 명 노동자들이 살해되었고 3,500명 정도가 식민지로 추방되었다.

1948년 유럽혁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혁명은 실패 이후가 더 중요했다. 1948년 유럽혁명은 이 점을 뚜렷이 입증했다. 호된 경험을 한 부르주아 계급은 하층 계급의 혁명성을 체제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고심했다. 그 일환으로 노동자 계급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을 확대시켰다.

마르크스와 동료들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이 승리하자면 자신들의 정당 결성이 필수적이며 이는 처음부터 개별 국가를 뛰어넘는 국제당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오랜 노력 끝에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라는 이름의 제1인터내셔널 노동자 계급 정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1인터내셔널은 내부 의견 차이로 지리멸렬해졌지만 각국 노동자 정당의 진출을 적극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선두 주자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존재감을 키워갔다.

비극의 절정, ‘파리 코뮌

이야기는 다시 혁명의 조국 프랑스로 되돌아간다. 1948년 6월봉기를 거치며 프랑스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피의 원한이 새겨져 있었다. 그 원한은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수 있는 뜨거운 용암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이들 노동자들에게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1870년 프랑스가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던 중 나폴레옹 3세가 포로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7월 4일 파리에서는 민중의 요구로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노동자와 소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국민군에 지원하여 프랑스 방위에 전력을 다했다.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를 포위 압박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애국적인 파리 민중은 자치 조직을 강화하면서 결사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는 노동자의 무장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서둘러 프로이센과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부르주아 계급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총 끝을 노동자를 향해 겨누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다음 해인 1871년 1월 부르주아 정부는 알사스·로렌 지방을 양도하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프로이센과의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파리 민중은 결사 항전을 고수하며 농성을 지속했다. 부르주아 정부와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파리 민중은 3월 28일 전 시민의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인 파리 코뮌을 출범시켰다.

파리 코뮌을 구성하고 있는 중심 세력은 프랑스대혁명 시기 공포 정치 형태의 혁명 독재를 신봉하는 급진적 공화주의자, 여러 부류의 사회주의자 그리고 무정부주의들이었다. 이들의 주도 아래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다양한 조치들이 잇달아 취해졌다. 집세와 만기 수표의 지불 유예, 빵 굽는 직공의 야근 금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 금지, 교육의 민주적 개혁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자본가가 내버린 공장에 대한 집단 소유와 노동자 관리를 천명한 ‘4월 16일 법령’이 발표되었다.

파리 코뮌은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탐색하는 전대미문의 실험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입장을 가진 세력들로 급조된 파리 코뮌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4월 초에 이르러 코뮌 평의회와 국민군 중앙위원회 사이에 군사 지휘권을 둘러싼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혁명 독재를 주장하는 다수파와 자율적 연합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사이의 노선 갈등은 5월초 공안위원회 설립을 계기로 한층 극대화되었다. 그에 따라 파리 코뮌의 응집력은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파리 코뮌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파리 코뮌은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할 지에 대한 프로그램이나 이를 집행할 지도력 구축 모두가 결여되어 있었다. 파리 코뮌은 비록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합법칙적 발전 과정이 빚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프로이센의 침략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굴욕적 협상이 야기한 다소는 우발적인 것이었다.

한편 베르사유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부르주아 정부는 5월 21일 고립된 파리를 향해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1주일간 파리의 노동자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삶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에서도 강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베르사유 측에서는 대략 1200명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코뮌 측은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베르사유 측에서는 1만 7천명을 학살했다고 인정하였으나 역사가들은 실제 학살된 수는 그 두 배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파리 코뮌은 유럽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었고 한 없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긍정과 부정 모두 포함해 그 누구도 파리 코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 역시 파리 코뮌으로부터 ‘피의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집약되었다.

첫째 자본과 노동 사이에는 화해란 없다. 둘째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것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 셋째 한 번 잡은 권력을 빼앗기면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넷째 기존 권력을 분쇄하고 아래로부터 새로운 권력을 창출할 때만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

네 번째 요소는 마르크스의 기대와 달리 사회주의 혁명이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가 아닌 러시아와 같은 자본주의 후진국이나 중국 등 농업 국가에서 발생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서유럽에는 일반 민주주의 확립으로 기존 권력에 대한 합법적 접근만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관료 조직은 출세주의가 지배하면서 부르주아 계급과 자신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킨다. 이러한 국가 기구를 무기로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반면 러시아혁명 과정에서는 제정 러시아 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비에트라는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민중권력이 태동했다.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역시 가존 권력이 붕괴사면서 새로운 민중 권력이 태동할 수 있었다. 바로 아래로부터 형성된 새로운 민중권력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후예들은 파리 코뮌이 남긴 네 가지 피의 교훈을 가슴에 새겼다. 이는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궤적을 절대적으로 규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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