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정책은 표를 위한 선심성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진단과 대안을 내놓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과정 없이 개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 보건의료영역에서는 매우 강력한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한다. 한국 의료인은 가장 강력하게 형성된 전문가 정치 집단이며, 제약회사·보험회사·병원 등 산업영역의 파워도 매우 크다. 경제영역에서 대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강력한 입장 없이 경제민주화와 노동개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처럼, 의료분야에서도 극복대상을 명확하게 하고 대안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를 얻지 않으면 단 한걸음도 나갈 수 없다. * 본 연구보고서의 일부는 새사연 과 중복됨을 알려드립니다.

 

1. 다른 발전단계, 다른 해법

사회정책 일반에 대한 공약평가 보고서에서 강조했듯이 사회서비스는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고 있으며 무작위적으로 발생하지만 누구나 겪게 되는 위험에 대한 충분한 대비 경제 발전을 위한 서비스 산업 발전, 비용마련과 집행과정, 서비스 결과물의 형평성 효율성이 사회정책 각 분야에서 달성해야할 목표이다. 각각의 목표들은 시기, 인구구조, 제도발전 수준, 내외 경제적 문화적 환경 등에 따라 강조되어야 할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인프라 구축과 재정지원-사회보험 보편적용의 과제를 조기에 달성한 한국 보건의료 시스템은 그동안 칭송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보건의료분야는 항상 “이정도면 훌륭한, 오바마도 부러워하는 한국 의료”로 평가받고 있고, 일부 의료인들은 “의료인의 과도한 희생으로 유지되는 저가 서비스”라는 주장도 한다. 하지만, 실제 의료현장을 들여다보면 문제는 매우 많다. 또한 사회복지 정책 역사에서 가장 초기에 구축되고, 우선순위로 다루어져 오면서 시기별 정책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함에도 초기의 정책기조가 거의 변화하지 못한 채 유지되고 있다.

 

2. 시대별로 달라진 보건의료 정책과제

 

인프라를 구축하라

보건의료분야의 경우,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는 인프라 구축이 가장 우선시 된다. 보건의료인프라는 의료인력, 병의원‧대학 등 기관, 의학지식‧기술 등 무형의 인프라, 의약품‧의료기기 등 유형의 도구 등으로 구성된다. 보건의료시스템은 이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여기에는 대규모의 공적 자금지원이 필요하다. 사회시스템과 경제 구조가 안정되지 못한 사회(경제적‧정치적 혼란지역_아프리카, 내전국가 등)에서는 안정적으로 보건의료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보건의료기본 인프라가 구축된 시기는 70~90년대였다. 해외 차관이나 원조 등이 주요 역할을 했고, 정부 역시 상당한 지원을 통해 비교적 빠르게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공이 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민간을 활용하는 방식(민간이 대학‧병원 등을 세울 때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미국식 복지제도이며, 한국의 사회서비스가 지나치게 민간 중심이 된 원인)으로 시작하였고, 확장과정에서도 공적자금 투자 민간 운영은 일관된 원칙으로 작용했다. (한국 보건의료 문제점 1 지나친 민간 공급자)

 

비용부담이 문제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중요한 과제는 서비스 구매 비용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다. 질병은 무작위로 발생하고, 치료비용 역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대처하게 되며, 누락인구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추구하게 된다. (건강보장의 기본원칙은) 재정부담 방식에 따라 조세방식(National Health Service)과 사회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방식으로 구분되며, 보장 항목과 본인부담 비율에 따라 잔여적인지, 포괄적인지 나누기도 한다.

한국은 사회보험방식을 택했으며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 2000년 건강보험 통합으로 매우 빠르게 의료비용을 사회적으로 부담하는 시스템을 확대할 수 있었다. 1990-2000년대 보건의료 정책의 주요 강조점은 재정확보를 통한 보장성확대 정책이었으며, 건강보장의 확대와 더불어 국민의료비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이 시기 의료산업은 크게 발달하고, 의료계열(의치한) 대학의 입학점수가 최고점을 찍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 보건의료의 성과는 후발 산업국가 중 세계적 모범사례로 손꼽히고 있고, 교육 보육 노인복지 등 한국의 다른 사회복지 분야와 비교해도 가장 발달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재정 지원 역시 인프라 구축이 민간 주도였던 것과 맞물려 낮은 의료기관 보상과 높은 본인부담률, 비급여 수익창출 보장 등 근본적 갈등요인을 가진 채 발전했다. 부족한 재정으로 전국민 확대를 서두르다보니 의료기관에는 낮은 보상(수가)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이를 보전하기 위한 비급여 수익창출과 운영의 자유를 주었다. 환자들에게는 병의원 이용에 대한 문턱을 낮춰주는 대신, 높은 본인부담율과 높은 비보험이 있었지만 의료이용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 한해서)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 결과 전국민 건강보험이 발전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보장률 45~55% 수준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고, 저소득층의 과부담 의료이용과, 중병시 파국적 수준의 의료비 지출, 고령자 가족의 과도한 의료비 부담이 전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한국 보건의료 문제점 2 낮은 보장성)

 

경로의존성으로 인해 문제 심화

1번 민간중심 시스템과 2번 부족한 보장수준과 민간기관 수익창출에 대한 자율성 보장은 상호 시너지를 내면서 지극히 상업적인 의료기관간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선택한 자율성이지만, 의원 vs 의원, 병원 vs 병원, 종합병원 vs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 vs 상급종합병원들끼리 경쟁이 아닌, 모든 의료기관이 동일한 환자와 동일한 질환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가 정책되었다.(한국 보건의료 시스템 문제점 3. 의료전달체계 붕괴)

의료전달시스템이란 일상적 일차 질환과 건강관리는 의원급에서, 질병의 난이도와 집중도가 높은 경우 상급 병원에서 다루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너지게 되면 당뇨고혈압이나 백내장, 감기 등 경증질환을 상급종합병원, 대학병원에서 다루고 환자들은 병원 쇼핑을 일상적으로 하게 된다. 담당 주치의가 등록된 환자가 어떤 검사와 진료를 받는 것이 가장 필요한지 결정하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며, 간단한 진료는 해결해주는 것이 일차보건의료인데, 한국 사회는 일차보건의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의료인과 의료기관 간 무한경쟁과 환자들의 지나친 의료기관 이용 자율성으로 나타나며 경쟁은 과다투자로 이어진다. 의료인은 전문의나 박사 등 과도한 스펙경쟁, 의료기관은 좋은 자리, 멋진 인테리어, 고가의 장비 등으로 투자비용을 늘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환자들의 의료이용에 대한 과도한 자율성이 맞물려 의료서비스 이용 빈도는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졌다.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내원일수, 의사방문, 입원, 검사, 수술 건수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건의료에서 과도한, 불필요한 의료서비스는 재정낭비 등 효율성에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건강과 형평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한국 보건의료시스템 문제점 4. 의료기관 과도한 경쟁과 의료서비스 오남용)

 

인구구조와 경제상황은 상수

여기에 대내외적 조건의 변화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인구구조와 경제상황 등이 그것이다. 국가 의료비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고령인구 비율이 꼽힌다. 고령인구 중에서도 특히 75세 이상, 80세 이상 후기노인의 비율이 중요하며 이들 집단의 비율과 건강수준, 의료서비스 이용 행태 등이 의료비 지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는 현재 고령사회 초입을 지나고 있다. 아직 본격적 고령사회가 되기 전이며, 노인의 인구구조 역시 전기노인(75세 미만)이 대다수인 고령사회 초입이다. 문제는 이런 인구구조가 매우 빠르게 변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2020년이면 베이비부머세대의 본격적 노령세대 진입이 예정되어있고 그 속도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는 빠른 속도이다.

고령화 예측과 현 의료서비스 오남용을 같이 보면,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현재 의료관행을 유지하면서 고령화로 의료수요가 늘어나면 의료비 증가는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의료비는 GDP의 18% 수준으로 일반적 서구구가의 2배정도에 달한다. 미국 의료비는 의료서비스 비용이 비싼 것이 그 원인으로 한국이 의료서비스 단가는 낮지만, 이용량이 많고 블필요한 비급여가 통제되지 못해 의료비가 높아지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과도한 의료비 지출은 국가 경제와 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미국 사회 가장 핫한 정치사회 이슈가 되고 있다.

 

고령화, 저성장, 그리고 비효율적 의료시스템 = 건강불평등

한국의 경우도 현재의 의료관행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고령인구의 급격한 증가가 닥칠 경우, 의료비 지출이 급격히 증가하거나, 필수적 의료서비스도 제공받지 못하는 집단이 늘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조건이기에,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현 의료관행을 빠르게 개선해야만 한다.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장기 저성장 국면이라는 경제상황이다. 고령화와 더불어 한국사회는 장기 경제침체에 빠져있으며 상당기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고령화와 저출산 부양인구 증가경제인구 감소 + 경제 저성장 세수감소와 지출증가 지출합리화와 복지효율성 확보”가 보건의료의 대외적 상수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양극화, 불평등과 연계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른 건강불평등은 이미 심각해지고 있다.(한국 보건의료 문제점 5, 건강불평등) 건강불평등은 ①경제적 이유로 의료이용을 못하거나 ②과도한 의료비 지출이나 질병부담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이 악화되거나 ③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위치 자체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등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한국사회 양극화와 경제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건강에서의 블평등도 심화되고 있다. 지역에 따른 사망률 격차는 매우 크며,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과 이로 인한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는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의료이용을 못하는 불평등으로 파국적 의료비 지출을 하는 가계의 비율이 매우 높으며, 질병=실업으로 가계 구성원 중 한명만 중병이 들어도 가구의 경제상황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질병으로 사회경제적 조건이 어려워지는 불평등 또한 저소득층이나 비정규직, 불안정한 취약계층의 건강수준은 매우 나빠지고 있다. 주거환경, 출퇴근 시간, 작업환경, 야간근무 등이 갈수록 악화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위치 자체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불평등이다.

또한 양극화와 고령인구 증가, 저성장 사회에서의 건강정책은 의료서비스 확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민 건강증진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노동조건이 열악해지면서 노동자 건강증진으로 인한 노동력상실을 보전하고 건강하게 노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과제나 노인들의 건강관리로 건강수명 연장을 통해 삶의 질 향상과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과제, 미세먼지나 환경오염 등 악화되는 환경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유지 등은 건강정책이 의료서비스를 더 저렴하게 받을 수 있는 정책에서 벗어나 건강증진을 추동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계속)

*표와 그림을 포함한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pdf 파일을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