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유언비어에 의한 미신적 공포인가?

메르스 탓에 온 나라가 그야말로 난리이다. 이름도 낯선 중동 발 바이러스는 채 한 달도 못되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집단 휴교와 자발적 외출 조심, 사회활동 축소의 영향은 지역경제를 강타하고 있고, 이대로 가면 경제에 미칠 파급력이 클 것이라는 예측도 쏟아진다. 정부의 초기 대응과 이후 난맥상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개인 예방수칙에 대한 정보까지, 한국의 온오프 세상은 온통 메르스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권에서는 사태 초기부터 아래와 같은 나름 일관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와 보건당국은 이 사태를 엄중 대처하고 있으며,
보건당국을 믿고 일상생활에 충실하길 바란다.
일각에서 부풀리는 것처럼 위험한 질병은 아니며,
과도한 걱정보다는 정부를 믿고 따르면 된다.
그리고 잘못된 유언비어 확산이 과도한 공포를 양산하고 있으니 이를 막아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양상이다. 사회에 충격을 주는 문제가 생기면, 과도한 공포로 집단 패닉, 소비심리 위축, 경제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제일 먼저 쏟아진다. 결국, 정부와 보수언론이 말하는 ‘정답’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린 무리를 색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부를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은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우민’이 되고, 정부와 지식인은 이를 바로 잡아 일상생활로 복귀시켜야 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정부와 전문가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문제해결을 막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일견 맞는 이야기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정부에 대한, 전문가와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부재한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인식이 팽배하며, 개인 삶의 지침 역시 스스로 판단하고 내 이익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식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정부가 ‘유언비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 원인은 다름 아닌 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신뢰를 ‘불확실성과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대상이 나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행동하리라는 주관적 기대와 이를 근거로 상대방에게 나를 맡기려는 자발적 의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기대를 갖게 되는 배경으로 능력(유능함과 전문성), 호의(호의, 배려, 선의), 진실성(성실성, 공정성), 일관성(약속이행), 개방성(정직성)을 꼽는다. 즉 신뢰대상이 능력과 선의, 진실성등을 보일 때에 믿고 의탁하는 신뢰관계가 형성된다. 쉽게 말해 믿을 수 있는 대상이라 판단되면 나를 맡겨도 괜찮다하는 심리상태가 발현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외부의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뢰대상인 정부가 믿을만 하지 않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트라우마로 얼룩진 한국사회

공포는 예측불가능성에서 생긴다. 인간 심리는 진화적 과정에서 형성된 세계관이 흔들릴 때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 세상이 예측 가능하다는 믿음(물리적, 시공간적, 관계적 차원에서), 그리고 내가 선한 행동을 하면 선함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낙관이 신뢰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암, 노쇠와 같은 만성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사고나 지진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에 훨씬 깊은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연재해나 전염병, 대형사고와 같이 예측 불가능한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깊은 사회적 신뢰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세상에 대한 신뢰가 깨질 때 인간은 세계관의 붕괴를 경험하고, 이는 뇌와 몸에 트라우마로 각인된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트라우마를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멀리는 식민지배 이후 일제청산과정에서의 이념대립, 한국전쟁 등의 분단 트라우마에서부터, 민주화과정의 인권탄압, 세월호를 위시한 대형사고 경험 등의 트라우마가 단 한 번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채, 켜켜이 쌓이기만 했다. 이렇게 세계관이 흔들리는 공포의 순간, 정부와 사회시스템의 선의에서 능력과 진실성을 느낄 수 없을 때에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에는 금이 가고 만다.

사회적 신뢰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적 과정 속에 있는 것이지, 대국민 담화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지식을 모른 채 유언비어에 휘둘리는 인간의 불합리성으로만 치부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 정부의 선의, 진실성, 개방성, 예측가능성 등은 비단 이번 메르스 사태 뿐 아니라 그 어떤 통치과정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나아가 현 사태에 대한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과 진실하지 못한 태도는 이 정부가 과연 선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까지 품게 하는 수준이다.

 

뭘 모르는국민이 문제?

전문가라 자부하는 의료인과 의료기관도 매한가지로 불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난 6월 13일 토요일, WHO에서는 한국에서 메르스가 급속도로 퍼진 원인으로 혼잡한 응급실, 닥터쇼핑, 그리고 가족들이 병원에서 직접 간병을 하는 “한국적 문화”를 꼽았다. 그러자 의료전문가들은 앞 다퉈 한국인의 병원이용 문화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들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의 인구대비 병상 수와 의료기관 방문횟수는 OCED 최상위 수준이다. 때문에 병원에는 환자와 의료인 이외의 외부인이 넘친다.

하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원인이라 볼 수는 없다. 병원과 의료기관을 믿지 못하고 쇼핑하듯이 돌아다니는 것이나, 가족이 병원을 같이 가서 간병해야 하는 이유는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의사의 수술 및 검진 권유가 정말 필요해서인지, 병원 수익을 위한 강매인지 알 수 없고, 믿고 갈만한 동네병원도 드물 뿐 아니라 내 가족의 병력을 자세히 알고 있는 주치의도 없다. 아프면 인터넷검색이나 주변 아는 사람을 동원해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무조건 큰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대형병원 응급실은 응급상황에 가는 곳이 아닌 대형병원을 가기위한 관문이 될 수밖에 없고, 응급실이 시장통처럼 붐비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병원은 이미 영리를 최우선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윤을 내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는 지경에 다다랐다. 한국의 간호사 수는 OECD 평균 대비 1/4 수준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이 탓에 간병인 없이는 입원생활이 불가능하다. 믿을만한 동네병원의 부재로 인해 대형병원을 찾는 노인들은 혼자 수속을 밟기도 어려워, 가족이 따라가야만 한다. 이와 더불어 정부는 병원을 복합쇼핑, 레져, 호텔 타운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여기에 미숙한 사후대처까지 겹쳐져, 의료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방역체계가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한국인의 의료이용관행, 의사를 불신하는 한국문화 운운하는 것은 의료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가수 신해철씨 사망사건 등에서도 두드러졌던 이윤 추구에만 열을 올리는 한국 의료기관에 대한 불신은 이번 메르스 사태와 같은 국가적 응급상황을 통해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국민을 전문가 말보다도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우민’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안정적 시스템이다. 세계의 구조적 불안정성, 예측불가능성이 높아질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상호간의 선의와 그에 기초한 신뢰, 그리고 신뢰에 기초한 안정적 대응이다.

신뢰회복을 위한 첫 단계는 공감이고 인정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다. 신뢰가 경제학의 상호적 관계와 다른 점은, 내가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상대에게 나를 의탁하는 사회·심리적 기제라는 점에 있다고 한다. 즉 게임이론처럼 이성적 판단에만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상황이 반영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정부나 의료기관이 만능 슈퍼맨이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의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진정성을 가진, 나를 믿어주는 우리 편이 되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 있다. 현재, 정부와 의료기관은 정말 우리 편이라고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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