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필자는 현재 가계부채 가구의 상태가 1300조를 훌쩍 넘어선 것에 비해 금융 자산 대비 금융 부채가 45%정도여서 국민경제에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무디스의 진단을 소개하며, 그렇다할지라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빚을 갚아 주지 않기에 경제 위기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제 더 나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어느 한 대상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할 때 다양한 시각과 다양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 가령 가계부채의 경우 채무자를 인권 감수성으로 인식하고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덜어 주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부채 탕감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가계부채 문제를 복지나 인권 감수성으로 바라보는 견해이다.
약간 시각을 달리해서 신용 시스템의 관점에서 가계부채를 보자. 역사적으로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죄였다. “너와 너의 죄를 사하여 주겠다”고 했을 때 죄는 계율을 어기는 것뿐 아니라 빚을 의미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죄의 정도나 그에 따른 처벌의 강도도 달랐지만, 매우 가혹했다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멀쩡한 자영농도 빚을 갚지 못하면 곧바로 노비 신세로 전락해 인신구속은 물론 자손대대로 노비 신세를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빚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다. 빚은 곧 신용으로 이해되고 채권 채무 관계는 경제생활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관행이 쌓여 금융 거래는 거대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진화하였다. 시스템으로 진화했다는 의미는 금융 거래가 고도로 복잡한 관행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개별 거래들이 유기적으로 작동되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처럼 되었다는 의미이다. 항상 그렇듯이 커다란 기계는 체계적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척척해내지만 작동 부품하나만 소실되어도 작동을 멈추는 특징이 있다. 시스템 수준에 도달한 잘 정돈된 금융 제도와 관행 덕분에 이전에는 생각도 못할 대단위 사업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용 시스템은 자신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위험 요소가 발현하면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끔찍한 무기로 변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위기 당시 전 연준(미국의 중앙은행) 의장 벤 버냉키는 금융권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이유를 이런 맥락에서 설명했다. 금융권의 문제를 내버려 둘 경우 그 여파가 실물경제 전반에 그리고 미국 사회 전반을 강타할 것이어서 부득이 하게 금융권에 납세자의 돈을 지출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중앙은행 뿐 아니라 재무부도 금융권에 공적 자금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재무부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 이름으로 제공된 조치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가계의 부실자산을 구제한 독특한 방식이다.
미 재무부가 구제한 것은 ‘채무자’가 아니라 ‘부실자산’이었다. 언뜻 구별되지 않을 수 있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다. 채무자를 구제한다는 것은 국가에게 채무자 개인에 대한 구제 의무가 있는지 아니면 채무자 자신이 스스로를 구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해이가 바로 이와 관련된 문제이다. 복지나 인권 감수성이 매번 부딪히는 벽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구제 대상을 ‘부실자산’으로 설정하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구제 대상을 고통받는 채무자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시스템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부실자산 구제의 정책적 목표는 부실 자산을 개인의 책임으로 보고 그대로 놔두었을 경우 피할 수 없는 채무불이행의 확산, 금융기관의 파산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신용 시스템의 붕괴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다. 결국 부실자산 구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용 시스템이 끔직한 무기로 변모시킬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되기에 그것이 탕감이라 불리던 대리 변제라고 불리던 신용 시스템과 실물경제의 안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공적 부실자산 구제이며 공적 채무조정이다.
공적 채무조정은 공적 부실자산 구제 와중에 채무자에게 이로운 채무 조정이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우 재무부의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을 통해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더 이상 부정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았고 또 경제가 회복할 수 있는 동력을 소진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즉 공적 채무조정 덕분에 경제 회복이 그만큼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 본 칼럼은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는 왜 한국의 가계부채가 위험하지 않다고 했을까?> 연재 칼럼입니다.
-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는 왜 한국의 가계부채가 위험하지 않다고 했을까? ①
-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는 왜 한국의 가계부채가 위험하지 않다고 했을까? ② : 가계부채 총량 증가 관리 대책, 문제 원인은?
-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는 왜 한국의 가계부채가 위험하지 않다고 했을까?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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