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수많은 독재정권과 반민주세력이 왜 ‘공화국’을 천연덕스럽게 표방할까?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한 쌍으로 배워온 터라 쉽사리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중을 현혹하기 위한 수사라고 여겼지만, 세상이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고민이 깊어졌다. 기존 권력에 친화적인 보수세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탱크를 몰고 한강을 건너 헌정을 유린한 군사정권마저 ‘공화’를 천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고대그리스의 아테네를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당시의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흔적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는 있으나, 당대의 철학사상을 살펴보면 민주주의로 여겨지는 정치형태는 공화주의로 인해 파생된 결과이지 목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을 간단히 살펴보면, 옳은 정치란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중요시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단순한 인민이 아닌 덕을 갖춘 공민(公民; public man)이 주도하는 정치제도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이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哲人)에 의한 정치와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정치가들이 덕을 갖춘 공민으로 행동하게 할 것인가이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갑질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시민들이 교대로 정치행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지금 권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일반시민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사리사욕만 추구하는 정치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지배와 피지배의 상황을 두루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철학적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때 지배라는 것은 타자에 의한 지배가 아닌 자기 자신에 의한 지배, 즉 양심에 따른 지배라고 하였다. 바꿔 말하면, 정치참여자는 양심이라는 덕을 갖춘 철인 또는 공민이어야 하는 것이다. 즉 아테네의 정치구조는 공공선(公共善)의 추구과정에서 나온 것이지 주권재민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사상은 고대로마의 정치가 키케로의 「공화론(De Re Publica
따라서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에게 정치형태는 자연법에 기초한 공공선이라는 덕이 정치를 통해 구현되도록 하기 위한 도구였다. 군주나 귀족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이 정치의 자격, 즉 덕을 갖춘 철인이라면 큰 상관이 없다고 보거나 오히려 그런 존재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기까지 하였다. 아무에게나 정치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전적 공화주의의 첫 번째 문제가 있다. 정치는 자격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 반한다. ‘주체적 공민이 합의를 통해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이 언뜻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공민에 여러 조건을 붙여서 제한을 두게 되므로 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두 번째 문제는 공민에 대한 기본 조건인 공공선이란 것이 민주주의에 기반하지 않을 경우 결국은 소수의 권력자나 엘리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의를 명분으로 수많은 민중을 어렵게 하고 자당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토대인 언론의 자유가 막힌 상황에서, 내국의 어려움을 틈타, 공화정이 파시즘과 독재로 흐르는 사례 또한 많이 보아왔다.
고대에 공화주의를 고민한 철학자들이 공공선이나 덕에 대해 고민한 이유는 민중이 사익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으나, 우습게도 공화정이 독재로 흐르는 것은 유권자가 이기심이 아니라 공익을 잣대로 정치가를 선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저소득층이 복지가 아니라 경제성장에 표를 던지는 이유는 나라를 살리기 위한 정의감 때문인 것이다. 권력자의 곁에서 정보를 조작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21세기의 괴벨스들이 오늘도 ‘산업화로 이룬 번영을 민주주의가 말아먹는다.’는 선동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국가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존재하지만, 아직도 노동권, 평등권과 같은 기본적인 인권을 제대로 보장받고 있지 못한 것이 인류가 처해 있는 현재상황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일찍이 간파한 루소는 경제적⋅사회적 평등이 전제되지 않는 공화주의는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후 정치사상의 논의⋅발전 과정에서 ‘주권재민이 곧 공화제’라는 상식이 형성된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는 투표권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이다. 그 이전에는 노동자, 여성, 이민자들에게 투표할 권리조차 없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진전에 위협을 느낀 세력의 준동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백색테러와 쿠데타가 유행하였다. 그 명분이 하나같이 국익이나 공익이었다. 민주화를 당분간 접더라도 자격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나라를 지키자는 명분에 딱 어울리는 것이 공화주의였다. 민주주의를 전제로 한, 독재의 저 맞은편에 있는 공화제가 이미 상식인 상황에서 민주를 슬쩍 지운 공화주의를 내세우면 독재라는 이미지를 줄임과 동시에 비교적 수월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공익으로 포장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신이란 명분으로 대통령을 선출할 권리조차 빼앗았던 정치세력의 명칭에 ‘공화’가 들어간 이유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세력이 오늘날까지 다수의 주권자들에게 지지받고 있는 이유는 이기심 때문이 아니며 지역감정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의 정보왜곡과 민주주의에 대한 조직적 폄훼, 개인의 정의감과 공공성이 복합되어 나타난 비극적 현상이다.
이처럼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쓰는 전략 중 하나가 공공성 시비이다. 복지정책에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포퓰리즘 공세도 같은 맥락이다. 서구에서는 ‘폭도에 의한 통치(mob rule)’라는 얼토당토아니한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런 공격이 드디어 마을공동체에도 노골화되기 시작한 듯하다. 서울시는 2012년 3월에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여 주민자치 공동체를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을, 마을공동체, 마을만들기에 대한 근본에 대한 논란이 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관심의 증가라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누군가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의 철학, 이념과 같은 근본을 추궁하는 것은 “네가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뚜렷한 징표이다. 존재의 이유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청산유수처럼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 ‘활동의 공공성’까지 들먹이면 재미나게 마을살이를 하고 있다가도 일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뉴타운사업이나 4대강사업과 같은 쓸데없고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은 정책에도 침묵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을이란 무엇일까, 마을공동체는 왜 필요할까, 마을만들기의 공공성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라고 나선다. 모든 주민이 나름의 마을을 꿈꾸고 서로 얘기하는 것, 그 이상의 정의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으나, 이에 당황한, 어쩌면 이미 동화되어 있는 의사결정자들은 ‘권위자’들의 의견을 모아 ‘마을공동체 지원정책의 아젠다’를 다시 세우라고 닦달한다. 그런데 이처럼 누군가의 생각을 바탕으로 마을을 정의하겠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이다. 교조주의와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마을공동체 지원이 ‘새마을운동’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유명인들이 한마디씩 거들어 만든 아젠다를 현실의 마을에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또 하나의 공권력을 사회에 얹는 것이고 이런 상황을 노린 세력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공익을 명분으로 색깔씌우기, 기득권지키기, 판깨기를 도모하는 것이 어떤 세력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변화에 대응하는 손쉬운 방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마을과 마을공동체에 대한 개념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울시의 조례에도 규정되어 있듯이 마을공동체에 대한 지원은 “주민 및 마을의 개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 이뤄지는 것이다. 애초에 다양성이 생명인 정책에 ‘혼란스럽다’는 명분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지역성, 혹은 지역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논의조차 필요하지 않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의 보장, 즉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토대인 것만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마을공동체 활성화의 공공성을 잘 모르겠다면 조용히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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