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총리 후보가 “소득과 부, 그리고 지식의 공정한 분배”라는 가치를 내걸고 전국의 대학에 ‘과학상점(science shop)’을 설립할 것을 공약한 바 있다. 참고로 네덜란드의 모든 대학은 등록금을 걱정하지 않는 국립이므로 정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과학상점’은 과학을 파는 곳이 아니다. 주민들이 마실 나가듯이 상점에 나가서 필요한 과학을 의뢰하는 곳이다. 대학과 공공기관, 민간연구소에 있는 전문 연구자들은 주민들이 생활에 필요한 연구를 무료로 수행해 준다. 예컨대, “우리 동네에 흐르는 하천에 냄새가 나요. 분명히 근처에 있는 공장 때문인 것 같아요.” 라고 주민들이 과학상점에 의뢰를 한다. 과학상점의 코디네이터들은 기초 조사를 거쳐 ① 해당 의뢰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② 과학상점 이외에는 연구를 수행할 가능성이 없는지 등의 기준에 부합하면 의뢰를 수락하고, 대학과 정부가 마련해 놓은 재정을 활용하여 관련 분야 연구자들을 섭외한다.

과학상점은 속된 말로 가방끈이 긴 사람들이 여가를 활용해서 수행한 단순한 ‘재능기부’가 아니다. 과학상점은 하나의 운동이었고, 이 운동을 주도한 활동가들은 문화적 다양성을 체득한 68세대들로, 이들은 68혁명 당시의 경험과 베트남 전쟁이 빚어 낸 파괴적 지식의 성찰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학상점의 연구 결과가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지식은 사회 안에 있을 때 결코 홀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과학상점 연구 의뢰를 수락하는 세 번째 기준이 ‘③ 그 결과를 활용할 주체적인 집단과 역량이 있는지’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초기 과학상점 코디네이터들과 그를 지원한 연구자들이 연구가 종료된 이후에 벌어지는 각종 소송과 활동에 조력자로만 참여한 이유는 지식의 위력과 한계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과학상점의 활동가들은 당대 지식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으나 동시에 다수 시민들에 의한 사회혁신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4월 30일 대전에서는 ‘과학기술 + 사회혁신’포럼의 주최로 ‘리빙랩(living lab)’을 추진하기 위한 토론회가 열린다. 리빙랩은 21세기에 과학상점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유력한 모델 중 하나다. 다른 점이라면, 과학상점이 생산하고 난 지식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 반면 리빙랩은 진일보하여 지식의 생산 자체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방식을 취한다. 리빙랩은 초기 단계인 연구개발 소재 선정에 주민이 참여한다. ‘생활밀착형 주제’, ‘사회문제해결형 주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전문가가 연구개발 주제를 선정하면 전문성은 자연스레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지마시라. 문제를 가장 오랫동안 접하고 있는 자야말로 그 문제의 핵심을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들은 그것을 체계화하여 표현할 훈련을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범할 수 있는 사소한 해석의 오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바야흐로 ‘사회혁신’이 유행하고 있다. 사회혁신이 추구하는 바를 한 마디로 딱 잘라 정의하는 것은 고도로 추상화되어 있는 ‘사회’를 정의하고자 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회혁신이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등등에 대하여 어느 것 하나도 손에 잡히는 질문-대답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혁신이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 되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과학상점 운동의 전통과 최근 리빙랩 설치 움직임 등은 연구집단이 해야 할 본연의 임무는 무엇인지, 사회혁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혁신을 꿈꾸는 연구 집단이라면 응당 시민들을 주체로, 시민들을 위하여, 시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식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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