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 협동조합의 실패사례를 아래와 같이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1) 노동자협동조합과 금융협동조합 : 사업이 번창해도 실패한다(2) 소비자협동조합 :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다(3) 농업협동조합 : 무리한 확장과 조합원의 무관심이 발목을 잡다*
이 글은 서울시가 발간한 <실패와 위기 그리고 성공 사례에서 배우는 협동조합> 책자에도 실렸습니다. (필자 주)

■ 농업협동조합 실패사례미국의 농업협동조합, 무리한 사업 확장과 조합원 이기주의로 파산하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농업 보호 관련 지원정책이 크게 축소되고 시장에서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적잖은 농업협동조합들이 파산하거나 투자자소유기업으로 전환하였다. 2000년에는 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미곡 가공 및 판매 농협 RGA가 파산했다. 2002년에는 중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다목적 연합농협이자 미국 농협 1위의 사업규모를 자랑하던 팜랜드와 동부 지역의 대표적인 다목적 연합농협이자 미국 농협 10위의 사업규모를 지녔던 애그웨이도 파산하여 매각되었다. 1) 쌀생산자 협동조합 RGA(Rice Growers Association) RGA는 쌀 재배 농가들의 협동조합으로 1921년 설립되어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다가 2000년 8월 파산했다. 1980년대 초에는 캘리포니아 전체 쌀 생산량의 70% 이상을 취급하였지만 파산 시점에는 전체 물량의 겨우 5%만을 취급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RGA는 공동 브랜드를 개발한 점, 대량의 쌀을 취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점, 시장 접근성이 좋았다는 점 등 중요한 강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파산하고 말았을까? RGA 협동조합의 파산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지목된다. 먼저 조합원들이 조합에 기대하는 요구 사항에 조합이 실질적으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괴리감의 문제가 있었다. 쌀 재배농가들은 RGA 협동조합에 호소력 있는 제품 차별화 전략을 기대했지만 경영진들의 미숙한 의사결정으로 인하여 그 기대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RGA 협동조합 관계자들은 RGA 협동조합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높은 자산유지 비용과 CRT(California Rice Transport) 해운과 체결한 비합리적인 계약을 지적하였다. 이는 초기 조합원들이 가입하도록 동기부여를 했던 높은 이익률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많은 조합원들은 RGA 협동조합의 경쟁회사가 오히려 더 큰 이익을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합을 탈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조합원들도 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조합원들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결정이 반복되면서, 조합원들의 의 요구가 잘 반영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사회의 관심 부족도 RGA 협동조합 몰락의 또 다른 주요 원인으로 언급된다.

미 농무부와 캘리포니아 데이비스 대학이 RGA가 몰락한 숨겨진 원인에 대한 원인을 공동으로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 경영진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뷰에 의하면 이사회의 수동성과 의사결정의 경솔함이 많이 지적되었다고 한다. 또한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이사회가 협동조합에 관한 지배력 및 통제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다시 말해 RGA는 조합원도 이사회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조합이었다. 공동 브랜드, 시장 접근성 등의 강점으로 인해 좋은 사업여건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별화 전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조합원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이것이 조합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저조로 이어진 것이다. 2) 애그웨이(Agway) 애그웨이는 다양한 분야의 영농에 종사하는 농업인으로 구성된 협동조합이었다. 1964년 농민공제조합연맹(GLF)과 동부주 농산물거래소, 펜실베이니아 농업협동조합이라는 3개 지역 연합회가 합병하면서 출범하였다. 뉴욕 주를 중심으로 13개 주를 관할 구역으로 하면서 미국 동북부 최대 협동조합으로 발전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동북부를 넘어 미국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협으로 올라섰으며, 1980년대에는 매출액 규모가 40억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는 농업성장기로 생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규모가 클수록 유리한 시절이었다. 규모의 경제를 이용하여 애그웨이는 농업 외에 석유, 사료, 보험, 리스업 등의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대했다. 1936년부터 시작한 석유사업은 동북부지역의 50만 명의 고객을 두었으며, 미국 내 2위 난방유 공급 업체로 성장했다. 사료사업 역시 동북부 지역 최대 가축사료 공급업체로 발전했다. 보험의 경우 10개 주에 300여 개의 점포망을 가진 규모로 성장했으나 이후 대형 보험업계와의 경쟁에서 밀려나서 사업체를 매각했다. 1964년에는 농업 부문 최대 리스회사인 텔마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농업불황이 닥치면서 애그웨이도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다양한 사업으로 진출하고 있던 터라 초기투자를 위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출액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85년에는 40억 달러, 1995년에는 16억 달러, 2002년에는 13억 달러로 급격히 떨어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지속적인 적자를 기록하여 파산 직전까지 적자 누적액이 1억 4천만 달러나 되었다. 또한 농업 인구의 감소로 조합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1991년 9만 명이던 것이 2002년 파산 당시에는 7만 명이었다. 파산 직전인 2002년 3월에는 구조조정을 통해 회생을 위한 노력을 했다. 보험업과 리스업을 매각하여 채무를 줄이고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2002년 10월 파산했고, 2003년 2월 매각되었다. 애그웨이는 수익성보다는 물량 위주의 규모 확대에 치중하다 위기를 자초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농민 조합원에게 필요한 사업이라면 전혀 경험이 없는 분야라 할지라도 무리하게 진출하였고, 이는 곧 실패로 이어져 큰 손실을 초래하였다. 애그웨이의 전신인 농민공제조합은 조합원에게 방송서비스를 제공할 목적으로 뉴욕의 농민단체와 함께 1946년 농촌 라디오네트워크라는 방송국을 설립하였다. 이 방송국은 97만 달러의 누적적자와 농민공제조합에서 조달한 136만 달러에 달하는 부채에 시달리다 1959년 헐값에 매각되고 말았다. 또한 애그웨이는 뉴욕 주 북부지역의 조합원에게 항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유에스 에어라인의 전신인 모호크 에어라인의 지분을 약 40%에 매입하는 등 핵심 사업이 아닌 사업 분야에 무리하게 진출하였다. 사업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신규 사업에 무리하게 진출했던 점이 부채를 과도하게 늘리고 유동성 문제를 가져온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PDF 아이콘을 눌러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기 바랍니다. [insert_php] if ( ! function_exists( ‘report’ ) ) require_once(‘/home/saesayon/script/report/report.php’);report( ” );[/insert_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