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지난 4월, 핀란드 정부가 지난해부터 진행해온 ‘기본 소득 실험’을 더 연장하지 않고 예정대로 올해 말쯤 매듭짓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실험을 맡은 핀란드 사회보장국(KELA)이 실험 연장을 요청했으나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정부가 이를 거부했다는 게 기사의 주장이다. 진원은 , <가디언>을 비롯한 영국 매체들이었다.

“핀란드 기본 소득 실험, 확대 계획 없어”(BBC), “핀란드, 2년 지나면 기본 소득 실험 마감”(가디언)

세계가 지켜보는 실험이었던 만큼 기사는 빠르게 퍼졌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부지런히 기사를 옮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논조가 조금씩 변했다. 첫 날 기사를 쓴 <한국일보>는 <텔레그래프>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 “핀란드, 조건 없는 ‘기본소득’ 실험 마감”으로 제목을 달았지만, 하루 지나 나간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은 “‘나랏돈 풀어 기본소득 보장’ 핀란드의 2년 실험 실패로”였다. 게다가 “국민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유례없는 실험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내, 사실상 실패한 것이라고 BBC는 평가했다”고 주장했는데, 와 <가디언>, <텔레그래프> 기사 어디를 봐도 ‘실패(Failure)’란 단어는 없다.

이튿날 사설들은 한 발 더 나갔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중앙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포기… ‘현금 쥐여주기 복지’의 실패”(동아일보), “핀란드 기본소득 포기…文정부 ‘세금으로 월급’ 접으라”(문화일보) 등, 제목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 사회보장국은 첫 보도가 나간 다음 날 “보도와 달리, 핀란드의 기본 소득 실험은 2018년 말까지 계속될 것이다”란 긴 제목의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보편적 기본 소득에 대한 핀란드의 실험적 연구를 다룬 정확하지 않은 보도들이 있었다. 실험은 계획대로 2018년 말까지 진행될 것이다… 현재로선 2018년 이후 실험을 지속하거나 확대할 계획은 없다.”

또 결과 분석은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시작할 것이므로 전체 실험의 고용 효과(이 실험은 고용률 변화를 확인하려는 실험이다)는 2019년 말이 지나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실험의 성패는 아직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사회보장국이 실험 연장을 공식 요청한 게 사실인지, 만일 공식 요청이 있었고 정부가 거절한 게 맞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 핀란드 정부가 답하지 않은 의문들은 남아있다. 또 실업자만을 대상으로 한 이번 실험을 과연 온전한 ‘기본 소득’ 실험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처음부터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이번 혼란은 단지 정보 해석의 차이나 ‘기본 소득’이란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삐딱하게 기사를 쓴 외신들이나, 이를 받아 섣부르게 결론을 낸 한국 언론들 모두가 이해하지 못한 건 ‘기본 소득’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실험의 나라’ 핀란드

핀란드 정부는 지난 몇 년간 정책 수립 과정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왔다. 이론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실험적이면서 구체적 근거(evidence)에 기반을 둔 접근법을 찾는 게 목표였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새로운 정책의 도입이나 정책 변화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과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실업자 2000명을 뽑아 아무 조건 없이 2년간 달마다 560유로(74만 원)를 지급하고 그 효과를 분석하는 대규모 실험을 진행할 수 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핀란드 정부는 지난해인 2017년 5월 ‘꼬께일룬 빠이까(Kokeilun Paikka)’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열었다. 우리말로 ‘실험 공간’이란 뜻으로, 시민이 가진 사회 문제의 해법이 현실에서 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사람과 지식 그리고 돈을 연결한다. 사람들은 이곳에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올리고 실험을 함께 진행할 동료와 다른 이들의 조언 그리고 실험에 필요한 돈을 모은다. 당연히 실험 결과도 이곳에서 모두와 나눈다. 정부가 나서서 이런 플랫폼을 만든 건 실험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

플랫폼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핀란드 정부는 2025년까지 혁신과 실험에서 세계적 리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2013년부터 데모스 헬싱키(Demos Helsinki)를 비롯한 몇몇 싱크탱크와 알토(Aalto)대학 등과 함께 ‘정부를 위한 디자인(the Design for Government)’ 모델을 연구해왔다. 실험을 통한 정책 수립을 실현할 사람 중심, 행동 기반의 방법론을 정립하는 게 목표였다. 이 모든 연구는 총리실이 주관했는데, 훗날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실험의 핀란드(Experimental Finland)’라는 프로젝트가 닻을 올렸다.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테스트와 시제품 제작을 거쳐 확산이 이뤄지는데 유독 정부만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괴상한 일이다. 그러한 경향이 정치를 근거에 반하도록, 아주 이론적이고 느리고 추측에 기대게 만든다.”

‘정부를 위한 디자인’ 연구에 참여했던 데모스 헬싱키의 미코 안나라(Mikko Annala) 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또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실험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도 말했다.

정부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딴 ‘실험의 핀란드’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이곳에서 시민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모으고 공유해왔다. 그리고 다시 몇몇 싱크탱크들과 함께 펀딩과 실험 그리고 정책 실행 과정을 분석한 뒤 이를 바탕으로 공공 혁신을 위한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소개한 ‘실험 공간(꼬께일룬 빠이까)’다.

플랫폼은 흩어진 정보를 한 데 모으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시민의 집단지성과 의지를 끌어낸다. 또 지역(지방정부)과 영역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이해관계자끼리 협력하고 함께 해법을 만들어가도록 돕는다. 누군가의 작은 아이디어가 모두의 실험으로 발전해가는 공간인 것이다.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실험’

‘실험의 핀란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지방정부 및 공공개혁부’ 베흐비래이넨 장관(Anu Vehviläinen)은 이 플랫폼이 “풀뿌리 단체들에게 사회 구조를 바꿀 기회를 제공한다”며 “사회혁신의 공간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이제까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공공 서비스를 뜯어고치던 관습에서 벗어나 시민 스스로 정보와 자금을 모아 실험을 진행함으로써 더 혁신적이고 과감한 정부 혁신, 공공 서비스의 혁신이 가능할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민과 정부의 경계를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방정부들도 실험에 적극적이다. 핀란드 동부의 작은 도시 리페리(Liperi)에선 5살 미만의 아이들이 매달 80시간까지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가 주요 정책 과제로 삼는 순환 경제, 새로운 노동, 인공지능(AI) 등도 플랫폼에선 중요하게 다뤄진다. 지난 6월 3일까지 더 나은 일상생활을 만들어갈 AI 실험 프로젝트를 찾는 공모를 진행했는데, 모두 37개의 제안이 모였다. 심사를 거쳐 뽑힌 21개의 실험엔 각각 3000~5000유로(390~650만 원)가 지원된다. 핀란드 남부 라펜란타(Lappeenranta) 시가 제안한 전기차 공유 서비스는 최근 ‘이달의 실험’에 뽑히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정부의 이런 과감한 실험 정책의 뿌리를 새로운 도전을 마다 않는 핀란드의 오랜 전통에서 찾기도 한다. 핀란드는 MS 운영체제인 윈도우즈의 아성에 맞섰던 리눅스(Linux)의 고향이자, 벌써 10여 년 전 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축제인 슬러쉬(Slush)가 태어난 곳이다. 1906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여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나라이기도 하다. 핀란드인들은 낡은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도전과 협력의 전통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핀란드만의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와 OECD 역시 몇 년 전부터 각 나라의 정책 결정 과정에 ‘행동 통찰(behavioral insights)’을 활용할 것을 권고해왔다. 새로운 정책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이를 판단의 근거로 삼을 것을 권고한 것이다. 실험적 접근법에 대한 공감대가 이미 유럽 사회에 폭넓게 형성돼있음을 보여준다.

덴마크도 2002년 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공공 서비스 혁신 방안을 찾고자 ‘마인드 랩(Mind Lab)’을 세웠고, 영국도 2014년 인간 중심의 디자인 접근을 기반으로 혁신적 정책 수립 방안을 연구할 ‘폴리시 랩(Policy Lab)’을 세웠다. 핀란드는 이들 나라가 머뭇거는 사이, 과감하게 국가 정책 수준의 실험을 전개했다. 기본소득 실험뿐이 아니다. 핀란드 정부는 나라 전체를 거대한 교통 실험실로 전환하겠다며 곳곳에서 수백 가지의 교통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핀란드의 기본 소득 실험은 어쩌면 거대한 전환의 시작일 뿐일지 모른다.

실험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행정안전부(장관 김부겸)는 지난 달 26일 정부혁신전략회의를 열었다. 지난 3월, 정부운영을 국민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정부혁신 종합 추진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이날은 10대 중점과제를 발표했다. 참여와 소통을 통한 정부혁신 추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사회혁신 추진, 국민참여를 통한 사회문제 해결, 풀뿌리 주민자치 강화 등이다. 좋은 말들이나 막상 구현하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하나둘이 아님을 정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익숙한 구조와 습관을 바꾸는 것도 만만치 않겠지만, 실험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서는 일도 어렵다. 꽤 높은 직급의 공무원이 모인 강연에서 ‘왜 세금으로 실험을 하느냐’는 질타를 받은 적도 있다. 앞서 ‘기본 소득 실험’ 소식을 전한 국내외 언론의 시각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험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실패도 교훈을 남긴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위험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실험의 실패는 더 큰 정책 실패를 막는 길이라는 인식의 전환도 절실하다.

“어떤 정책이 결함이 있고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 실험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큰 정치적이고 재정적인 실패를 피하도록 미리 도왔기 때문이다.”(로저 조웰 Roger Jowel 교수)

지난 3월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전 세계 156개국의 ‘국민 행복도’를 조사해 ‘2018 세계행복보고서’를 발표했다. 1등은 핀란드, 우리나라는 57위였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벌이는 실험을 조롱이나 하고 있을 처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