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로 국회 지형이 또 한 번 변했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2년 만에 7석이 늘었고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9석이 줄었다(물론 그사이 전 국민의당을 포함한 세 당 간 이합집산도 있었다). 그렇다면 2년 만에 다시 국민의 뜻에 따라 구조조정을 거친 대한민국 국회는 그만큼 더 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별로 그렇지가 않다. 선거가 끝난 지 보름이 다 되도록 국회는 여전히 개점휴업인 채로 머물러 있다.

 

‘정당’이라는 안경을 벗어 던지면 국회가 달리 보인다. 이번에 뽑힌 국회의원 12명의 평균 나이는 55.6세로, 48세인 ‘막내’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50~60대다. 2년 전인 20대 총선(2016.4.13) 직후 국회의원 300명의 평균 나이가 55.5세였으니 이번 선거로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대한민국 국회엔 여전히 20대 의원은 한 명도 없고 그나마 30대 의원도 두 명뿐이다. 또 새로 뽑힌 12명도, 의원직을 잃은 12명도 모두 남성이니 여전히 300명 가운데 83%가 남성이다. 12명은 모두 대학을 나왔고 석·박사들도 즐비한데, 20대 총선 당선인들도 그랬다. 이렇게 보면 이번 선거로 대한민국 국회는 생각만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국회가 국민을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의 절반은 여성이어야 하고 적어도 서른 명쯤은 20대여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의원,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던 의원도 있어야 한다. 아이 맡길 곳이 없어 하루가 멀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들, 2년마다 이사 갈 곳을 찾아 발품을 팔아야 하는 세입자들 그리고 권리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날까봐 건물주 눈치만 살피는 가게 사장들도 몇 명쯤은 국회에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렇게 되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아쉬운 대로 이들의 목소리를 국회에 직접 전달하는 건 어떨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국가 입법 기관들의 사회 혁신 실험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참여 민주주의 선진국, 브라질의 데모크라시아

 

브라질의 현대 정치사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닮았다. 1964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로 1985년까지 21년간이나 군사정권의 독재가 이어진 것도 그렇고, 1980년대 내내 민주화 운동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그렇다. 1983년에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이제 직선제를(Diretas ja, 지레타스 자)’ 운동이 벌어진 것도 우리와 닮았다.

 

진보 정치의 역사는 우리보다 한참 앞서있다. 1979년에 노동자당(PT)이 만들어졌고 1980년대부터 이미 많은 의원들을 중앙·지방의회에 진출시켰다. 1989년엔 노동자당이 집권한 포르투 알레그리(Porto Alegre) 시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참여예산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노동자당 창당을 이끌었던, 초등학교도 못 나온 노동자 정치인 ‘룰라 다 시우바(Lula da Silva)’가 훗날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브라질은 디지털 민주주의에도 일찍 눈을 떴다. 2009년 브라질 연방의회(하원)는 ‘이-데모크라시아(e-Democracia)’라는 디지털 공론장을 만들었다(브라질 연방의회는 상·하원으로 나뉘는데 법을 만드는 일은 하원의 몫이다). 내년이면 벌써 10년이 된다.

 

역사학자인 템마 카플란(Temma Kaplan)은 <당신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란 책에서 민주주의의 치명적 결함 가운데 하나로 “선출된 공직자들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 생각을 공유하고 갈등을 해결할 효과적이고 정규적인 소통 방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꼽았다. 이-데모크라시아를 만든 이들의 생각도 같았다. 이들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정치적 대리인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시민들이 더 잘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럴 때 시민을 위한 더 나은 법이, 더 투명한 절차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데모크라시아가 탄생했다.

 

플랫폼은 몇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의원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위키(wiki) 방식의 협업 툴로 법안의 초안을 만들어가는 위키레지스(Wikilegis)라는 공간이 있다. 또 특정 주제에 대해 토론을 나누고 투표를 할 수 있는 기능도 있다. 의원과 시민이 온라인에서 만나 실시간으로 토론을 벌이는 라이브 위원회도 열린다.

 

가장 성공적인 입법 사례로는 ‘청년 법안(Youth Statute Bill)’과 ‘시민권리법안(Civiel Rights Bill)’이 꼽힌다. ‘청년 법안’을 만드는 데는 브라질 전역의 청년들이 참여해 최종 법안의 30%를 직접 작성했다. ‘시민권리법안’도 시민 374명의 집단지성으로 만들어졌다.

 

청년들은 학생들을 위한 인턴쉽과 기타 다양한 전문 프로그램에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길 바랐고, 그와 더불어 유연한 근무 조건이 마련되길 요구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법률안의 초안이 만들어졌다.

 

19조. 청년들의 직업 전문성과 노동, 수입에 대한 권리 실현을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③ 일과 교육의 일정이 조응하도록 특별한 조건을 제공해야 한다.

⑥ 관련 기관으로부터 법적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⑦ 일하는 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신용을 제공해야 한다.

⑨ 공공 기관에 견습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이-데모크라시아의 성공 뒤에는 하원에서 일하는 약 200명의 입법 컨설턴트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들은 본래 의원들의 입법 활동을 돕는 일을 하지만 이-데모크라시아에서 토론을 준비하고 시민들의 제안을 분석해 의원과 위원회에 보고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다. 그래서 시민들은 이들을 ‘전문 번역가(technical translators)’라 부른다. 이들은 최종 보고서도 작성하는데, 이 보고서에는 누구의 제안이 어디에 반영되었고, 최종적으로 의원이 이에 대해 왜 찬성 또는 반대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담긴다.

 

2013년에는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 의원과 입법 전문가 그리고 시민들이 모여 플랫폼을 발전시키기 위한 해커톤을 열었다. 입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시민들이 입법 과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해커톤은 ‘랩해커(LabHacker)’라는 연구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랩해커가 이-데모크라시아를 발전시키는 책임을 맡아 더 많은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안들을 연구하고 있다.

 

2009~2015년 사이에 위키래지스에서 1000여 개의 법률안 수정 제안이 등록되었다. 2016년 9월까지 3만7000명이 가입했고, 누적방문자는 520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같은 기간에 전체 의원 513명 가운데 176명이 가입했고 이 가운데 30명만이 플랫폼을 이용했다. 아직 전체 의원의 6%에 그치고 있다.

 

의원이 토론을 이끄는 프랑스의 의회와 시민

 

프랑스에는 ‘의회와 시민(Parlement et Citoyens, 팔러머 에 시트와이어)’이 있다. 이-데모크라시아와 달리 시민사회가 주도해 만들었다. 불투명한 입법 과정에 환멸을 느낀 전직 공공 정책 컨설턴트이자 의회 보좌관이었던 씨릴 라지(Cyril Lage)와 지역 거버넌스를 위한 참여 툴을 제작하던 디자이너 아멜 르 코즈(Armel Le Coz)가 처음 일을 벌였다. 그리고 참여예산제와 온라인 토론 등을 위한 협력 툴을 개발해온 시민단체 캡 콜랙크찌프(Cap Collectif)가 힘을 보탰고, 6명의 의원들과 싱크탱크들도 도움을 줬다. 자금은 정부 보조금과 개인 후원 등으로 충당했다.

 

‘의회와 시민’에서는 의원들이 더 적극적이다. 의원들은 직접 ‘협의(consultation)’를 열어 시민을 만난다. 어떤 주제와 이슈에 대해 의원이 나서서 시민의 의견을 모으고 법안의 초안을 함께 만들어 간다. 의원은 영상으로 주제와 법안을 시민에게 설명한다. 협의에 참여한 시민의 의견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도 알려준다. 협의가 열리면 시민들은 한 달 이상 새로운 제안이나 수정의견을 낼 수 있다. 학술 자료와 같은 전문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투표로 의견을 보탤 수도 있다.

 

조엘 라비(Joël Labbé) 상원의원이 주관한 생물 다양성 관련 협의에는 환경부장관 세골렌 르와얄(Ségolène Royal)이 지지를 표하면서 많은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 협의엔 2049개의 제안이 몰렸고, 5만1516번의 투표가 이뤄졌다. 결국, 355개의 새로운 조항이 제안되고 503개의 수정 제안과 1127개의 의견, 67개의 새로운 정보가 제공된 끝에 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2015년에 제안된 ‘디지털 공화국 법안’은 총리인 마뉘엘 발스(Manuel Valls)와 디지털부 장관인 악셀 르메르(Axelle Lemaire)가 지지를 보내면서 역시 많은 참여로 이어졌다. 8500개의 참여, 15만 번의 투표가 이뤄진 끝에 11개의 새로운 조항으로 만들어졌다.

 

의원과 시민이 실시간으로 토론을 진행하기도 한다. 앞서 의견을 제시한 시민 가운데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세 명과 의원이 선택한 세 명 그리고 균형 있는 토론을 위해 스탭들이 선택한 두 명이 토론에 초대된다. 토론이 끝나면 토론을 주관한 의원과 자원봉사자가 함께 최종 보고서 또는 법안을 작성한다. 여기엔 시민의 의견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가 담긴다.

 

플랫폼의 스탭들은 토론을 조율하고, 폭력적이거나 토론을 방해하려는 의견은 따로 관리한다.

 

무엇보다 전체 의견을 살피면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역할을 맡는데, 문제, 원인, 해법, 또는 법안의 조항 등으로 의견을 나누고 요약함으로써 시민들이 더 쉽게 토론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장 인기가 많은 주장만을 보여주기보다는 모든 주장을 고르게 보여줌으로써 의원과 시민 모두 더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초기엔 회의적 시선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플랫폼을 사용하는 의원들이 늘어 약 3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의원의 입장에선 시민의 의견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건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를 내세워 의원들의 판단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민을 처음부터 참여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시민들을 적당히 들러리로 세우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민의 반응은 좋은 편이다. ‘디지털 공화국 법안’ 협의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의회와 시민’ 플랫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더니 응답자의 19%가 10점 만점에 10점을 줬다. 8점을 준 24%를 포함해 6점 이상의 점수를 준 응답자가 전체의 79%였다. 52%는 다른 토론에도 참여하겠다고 했고, 45%는 주제에 따라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미 토론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평가다.

 

“(이곳엔) 항상 본 적 없는 시각과 떠올려보지 못한 제안과 검토 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경험과 지식과 분석과 제안을 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로 확장해야 한다.”

 

‘의회와 시민’에 처음부터 참여했던 도미닉 람부르그(Dominique Raimbourg) 의원의 말이다. 20명의 의원들이 워킹그룹을 만들어 법안 제정에 앞서 온라인 토론을 의무화하는 법안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번에 살펴본 지방정부의 사례 (대출 갚지 못해 쫓겨난 시민들이 만든 정치 조직)와 마찬가지로 앞서 두 플랫폼 모두 사회의 모든 계층을 고르게 대변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데모크라시의 경우, 참여자 4500명에게 물어보니 77%가 남성이고, 82%가 고등 교육을 마쳤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정치적으로 배제된 집단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한국 정부와 국회는 시민의 참여를 바라고 있을까

 

우리나라엔 ‘국회톡톡(http://toktok.io)’이란 입법 청원 플랫폼이 있다. 누구나 입법을 제안할 수 있고 1000명 이상의 공감을 얻으면 제안이 국회의원들에게 이메일로 전송된다. 관심을 보이는 의원(들)이 나타나면 함께 오프라인 토론회 등을 열어 법안을 만들고 발의하게 된다.

 

앞서의 사례들에 견줘 단순해보이지만, 문을 연 지 1년 만인 2017년 11월에 어느 워킹맘의 제안이 근로기준법 개정안으로 만들어져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근로기간 2년 미만의 노동자도 1년차에 11일, 2년차에 15일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금까지 모두 540여 개의 제안이 올라왔다. 하지만 민간의 노력만으로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다. 50~60대 고학력 남성을 닮은 대한민국 국회의 선의에 기대기엔 우리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

 

유럽연합은 디지털 사회 혁신에 많은 투자를 해오고 있다. 시민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함으로써 시민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게 큰 줄기다. 디지털 기술로 집단지성을 이끌어 내면 더 많은 이들이 차별과 배제 없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다.

 

2019년까지 6500만 유로(약 845억 원)를 ‘DSI4EU(유럽을 위한 디지털 사회 혁신)’ 프로젝트에 투자해 민주주의뿐 아니라 건강, 교육, 환경, 이민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1000여 개의 디지털 사회 혁신 시도들을 연결하고 지원하고 있다. D-CENT(자세히보기)라는 시민 협력 툴을 개발하는 데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비례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뜯어고쳐 국민을 닮은 국회를 만들 생각이 없다면, 국회와 정부가 나서서 제대로 된 디지털 공론장이라도 만들어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한때 세계가 부러워하던 디지털 강국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너무 느리고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