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만드는 혁신적 사회 변화, 우리는 그것을 ‘사회 혁신(social innovation)’이라고 부릅니다. 시민의 힘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일,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실패를 아프게 경험한 우리에게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지금부터 그 쉽지 않은 길을 여러분과 함께 찾아보려 합니다.

 

2008년 전 세계로 번진 금융 위기로 북유럽의 작고 부유했던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크게 휘청거렸다. 인구 30만 명이 사는 이 작은 나라는 한때 런던과 같은 금융 허브를 꿈꾸며 금융 산업을 키웠으나, 아이슬란드 3대 은행의 파산과 함께 그 꿈도 무너졌다.

 

거품이 꺼진 자리엔 정치인과 은행가, 기업인들의 검은 뒷거래가 실체를 드러냈다. 국민은 더 이상 정치를 믿을 수 없었다. 한때 1인당 국민소득이 6만 달러에 달하던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빚 독촉에 시달리며 당장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고 참다못해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수도 레이캬비크의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갔다.

2010년 치러진 아이슬란드 지방선거에선 욘 그나르(Jón Gnarr)라는 코미디언이 최고당(The Best Party)을 만들어 선거에 나섰다. 선거 내내 정치와 대의 민주주의를 조롱하던 그는 수도 레이캬비크의 시장이 되었다. 창당 6개월 만이었다.

 

비슷한 시기 스페인에서는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하루아침에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속출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은 2009년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들을 위한 플랫폼(PAH)’을 꾸려 정부의 가혹한 정책에 맞섰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2011년 5월 15일 훗날 ’15M운동(Movimiento 15M)’으로 불리게 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스페인 국민 6명 가운데 1명이 참여한 이 거센 흐름은 새로운 풀뿌리 정치 조직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2015년 5월에 치러진 스페인 지방선거에서 수도 마드리드,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등에서 정치 권력을 갈아치웠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실망하고 분노한 시민들에게 이들은 다른 정치, 더 나은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렇게 ‘디지털 민주주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2010년에 시작된 디지털 민주주의 실험

 

2010년 아이슬란드 지방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레이캬비크에 뿌리를 둔 비영리 재단인 시티즌즈(Citizens Foundation)가 ‘더 나은 레이캬비크(Betri Reykjavik)’라는 웹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더 나은 지역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시민 참여와 숙의의 공론장이었다.

 

이들은 선거에 나선 모든 정당들이 이 플랫폼으로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도록 기꺼이 공간과 권한을 제공했다. 그러나 욘 그나르가 이끄는 최고당 말고는 아무도 이곳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선거에서 최고당은 레이캬비크 시의회 15개 의석 가운데 6석을 얻었고 연정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시민들에게 플랫폼을 알리고 참여를 이끌어내려 애썼다. 그러자 문을 연 지 한 달 사이에 유권자의 40%가 사이트를 방문해 무려 2000개에 달하는 의견을 올렸다.

 

‘더 나은 레이캬비크’는 대의 민주주의의 빈 곳을 시민의 직접 참여와 숙의로 메우려는 시도다. 레이캬비크 시민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정책과 법안을 제안할 수 있다. 투박한 아이디어라도 상관없다. 이어 토론과 숙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이 달리고 투표도 이뤄진다. 매달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10~15개의 제안은 시의회로 넘어간다.

 

심야 버스를 자정까지 운행하게 해달라는 의견에서부터 수영장을 비롯한 공공장소에 성소수자들을 배려해 성별 구분이 없는 화장실·탈의실을 만들어달라는 의견까지, 또 반려고양이 등록제를 실시하자는 제안에서부터 아이들에게 개와 소통하는 법을 가르치자는 의견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제안들이 올라온다. 2016년 말까지 모두 1045개의 제안들이 시의회로 넘어갔다. 물론 시의회로 넘어간다고 모두 정책이나 법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플랫폼이 문을 연 이듬해인 2011년부터는 ‘참여 예산제’를 도입하면서 ‘우리 동네(Hverfið mitt)’라는 기능을 추가했다. 시민들이 사업을 제안하면, 먼저 시 건설 위원회가 예상 비용과 사업 타당성 등을 평가한다. 해볼 만한 사업이라는 평가가 내려지면 시민 투표에 부친다. 아이슬란드의 공식 투표 가능 연령은 18세 이상이지만 이 플랫폼에서는 16세부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해마다 시 건설 예산의 5%정도인 360만 유로(약 45억5000만 원)가 참여 예산제에 배정된다.

 

2016년까지 420여 개의 시민 제안 사업이 실행에 옮겨졌다. 공원과 운동장을 늘리고 오래 된 길을 손봐달라는 것에서부터 버려진 공장을 청년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자는 것까지, 또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를 늘리자는 것에서부터 ‘다스베이더’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자는 것까지 다양한 제안들이 현실화되었다. 9살짜리 어린이가 올린, 현장 학습을 더 자주 다녔으면 한다는 의견도 받아들여졌다. 2018년 올해는 지금까지 820개의 사업이 제안되었다.

 

지금까지 레이캬비크 인구 약 12만 명 가운데 2만2783명이 등록해 모두 7725개의 제안을 올렸다. 누적 방문자는 7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부터는 2030년까지의 중장기적 교육 정책을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려는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디사이드 마드리드, 기술로도 넘기 힘든 1%의 벽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는 2015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지금 마드리드’라는 뜻의 신생 정당인 ‘아오라 마드리드(Ahora Madrid)’의 마누엘라 카르메나(Manuela Carmena)가 시장으로 당선된 지 3개월 만이다.

 

‘더 나은 레이캬비크’처럼 누구나 손쉽게 정책과 법안을 제안할 수 있고, 토론을 거쳐 투표가 이뤄지는 구조다. 해마다 6000만 유로(약 760억 원)에 달하는 시민 참여 예산의 쓰임새도 이곳에서 결정한다. 16세 이상의 시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누군가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면 다른 이들은 지지(Support) 버튼을 눌러 공감을 나타내거나 댓글로 의견을 달 수 있다. 마드리드 시민 1%(현재 2만7662명)의 공감을 얻으면 이 제안은 눈에 잘 보이도록 플랫폼의 상단에 노출된다. 처음엔 기준을 2%로 정했으나 2016년 중반에 낮췄다.

 

1%의 공감을 얻으면 45일간의 토론을 거쳐 시민 투표에 부쳐진다. 과반의 찬성을 얻으면 시의회가 한 달 안에 예상 비용과 적법성, 실현가능성 등을 따져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가 만만치 않다. 2016년 말까지 약 1만3000개의 제안이 올라왔으나 1%가 넘는 지지를 받은 건 겨우 56개, 그리고 시민 투표까지 통과한 건 2개뿐이다.

 

하나는 마드리드를 100% 지속가능한 도시로 만들자는 제안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의 승차권으로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시의회가 시민의 의견을 묻고자 직접 발의한 의제들로, 그란 비아(Gran Via) 역 주변에 산책로와 쉼터를 늘리자는 구상이나 에스파냐 광장의 리모델링 방향에 대해 시민의 의견을 묻는 것들이었다.

 

정책과 입법 제안과 달리 참여 예산제는 시간표가 정해져 있다. 1~2월에 사업 제안을 받고, 3월에 시민의 의견과 공감 여부를 확인한 뒤, 5월까지 시의회가 사업의 타당성을 평가한다. 그리고 7월까지 시민 투표를 진행해 높은 지지를 받은 것들부터 이듬해 사업 계획에 반영하게 된다. 6000만 유로의 절반은 시 전체 사업에, 나머지는 각 구 별로 배정되는데 시민들은 각각에 10번까지 투표할 수 있다.

 

사업 첫 해인 2016년엔 모두 5184개의 사업이 제안되었다. 시의회는 비슷한 제안들을 통합하도록 중재하는 역할도 한다. 623개의 제안이 타당한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것들이 투표에 부쳐졌다. 2016년엔 시 전체 사업으로 노숙자 지원 프로그램과 시립 유치원의 확충, 치매센터 설립 등을 비롯해 22개의 사업이, 2017년엔 전기자동차 충전소 확충과 저소득층을 위한 식품은행 설립 등을 비롯해 35개의 사업이 뽑혔다. 현재 마드리드 시 인구 320만 명 가운데 약 20만 명이 등록해있다.

 

프랑스 파리의 값비싼 참여 예산제 실험

 

2014년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안 이달로(Anne Hidalgo)가 수도 파리의 첫 여성 시장으로 뽑혔다. 그녀는 ‘더 많은 시민의 참여로 사회적 요구에 답하는 더 협력적인 도시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나는 파리 시민을 믿는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이 도시를 잘 안다. 나는 그들이 함께 도시를 만들고 성장시킬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길 바란다.”

 

2014년 9월, 시는 참여 예산제를 시범 도입했다. 시가 제안한 15개 사업을 시민 토론과 투표에 부치는 방식이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시는 2000만 유로(약 253억 원)를 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시장님, 저 아이디어 있어요(Madame la Maire, j’ai une idée)’라는 재밌는 이름의 플랫폼을 열었다. 지금은 그냥 ‘파리 참여 예산(Paris Budget Participatif)’이다.

 

시는 2020년까지 5억 유로(약 6300억 원)를 시민 참여 예산에 배정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엔 1000만 유로(약 127억 원)를 청소년·교육 예산으로, 3000만 유로(약 380억 원)를 소외 계층 예산으로 따로 배정했다.

 

1~2월에 접수를 받고 3~5월엔 공동 창조 과정이 진행된다. 비슷한 의견을 제안한 개인 또는 그룹끼리 모여 구상을 재정의하고 발전시켜 간다. 여름엔 많은 공감을 얻은 사업들을 다시 한 번 공유해 숙의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다. 이때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실제 구현가능한지, 예산은 적당한지 등 최소한의 기준에 맞는지도 검토한다. 그리고 지역과 파리시를 담당하는 행정 담당자와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시민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함께 구상을 다듬어간다.

 

마지막으로 9월에 시민 투표가 진행된다. 투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가능하며, 이렇게 뽑힌 사업들은 12월 예산에 담겨 이듬해에 집행된다. 사업의 진행 상황은 인포그래픽과 구글맵 등으로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첫 해인 2014년에는 도시에 수직 정원을 조성하는 사업부터 안 쓰게 된 공중전화박스를 음악과 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사업 등 모두 9개의 프로젝트가 뽑혔다. 2015년부터 300만 유로(약 38억 원)를 투여해 여러 고층 건물 외벽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려 넣은 프로젝트는 지금도 성공적인 사업으로 꼽힌다.

 

2016년엔 파리 시의 인구 약 220만 명 가운데 15만8964명이 시민 투표에 참여해 3158개의 아이디어 가운데 219개를 뽑았다. 6만6000명의 어린이들이 1000만 유로의 교육 예산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기도 했다. 3년 만에 400개가 넘는 프로젝트가 시의 예산으로 진행되었거나 되고 있다.

 

한국의 디지털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디지털 민주주의는 간단히 ‘디지털 도구나 기술을 활용해 실행되는 민주주의’를 가리키지만, 그 도구와 기술이 시민에게 어떤 권한을, 얼마만큼 부여하는가에 따라 차이는 크다.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참여와 숙의의 공간을 열어준 것은 맞지만, 그 공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있다고 자신하기엔 아직 이르다.

 

‘더 나은 레이캬비크’의 경우,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의 절반은 36~55세였다. 16~35세는 약 30%였고, 56세 이상은 20%였다. 최근 마드리드 시의회가 시민 약 1만 명에게 ‘디사이드 마드리드’를 아는지 물었더니 56%만이 안다고 답했다. 교육 정도에 따른 차이도 컸는데, 대학교육 이상을 받은 응답자는 75%가 ‘디사이드 마드리드’를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16~18세까지만 교육을 받았던 이들은 그 비율이 39~45%로 낮아졌다.

 

어느 플랫폼도 참여하는 이들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비롯한 충분한 자료(개인정보)를 확보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입장과 처지를 고르게 반영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곳도 없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또 다른 소외와 배제를 낳지 않으려면 그에 걸맞는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많은 제안이 몰리면서 폭넓은 공감과 숙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점도 한계로 꼽혔다. ‘디사이드 마드리드’에서 1%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데는 이런 점도 한 몫 한다. 또 주거 환경이나 시설 개선을 넘어 사회 통합이나 실업, 빈곤과 같은 사회적 난제를 풀어가는 데 이들 공론장이 더 큰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유럽에 견줘 비례성이 턱없이 낮은 우리나라의 선거제도로는 기존 권력을 갈아엎을 새로운 정치 흐름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아마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그런 이변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민주주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권력을 통째로 갈아치우진 못하더라도 지방정부 운영에 시민의 목소리를 조금 더 담아내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다. 벌써 많은 후보들이 내세운 공약이기도 하다.

 

앞서의 플랫폼들을 흉내 낸 그럴 듯한 사이트 하나 만들어놓는다고 하루아침에 우리 민주주의가 달라질 리는 없다. 디지털 민주주의란 나무도 기술만으로 자라진 않는다. 그래서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