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지중해 동쪽 끝 연안 어딘가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종이 셋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각자 재능이 달랐다. 어느 날 부자는 멀리 떠날 일이 생기자 그 중에 제일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다섯 달란트, 다음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두 달란트, 그리고 나머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 모으니,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의 이문(利文)을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이문으로 남겼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들고 왔다.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이자라도 받았으면 조금이라도 이문이 남았을 텐데 그 종은 장사도 두렵고 원금을 떼이는 것도 두려워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그 종을 어두운 곳으로 내쫓고, 종에게 맡겼던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를 만든 종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목자들은 절대주가 내린 재능을 그 은혜를 갚는 일에 써야 한다는 교훈으로 새겨들으라 해석하지만,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직장에서 흔히 보는 사장이나 상사를 보는 듯하여 영 씁쓸하다.

달란트는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의 기록만을 놓고 따져보면 6천 드라크마에 해당한다. 그리스 지역에서 1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은의 무게였다. 즉, 1달란트는 6천 일치 품삯에 달하는 매우 큰 양이다.

달란트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변형된 발음이며, 고대 그리스식 발음으로는 탈란톤(τάλαντον), 라틴어로는 탈렌툼(talentum)에 가깝다. 미국식 영어로는 탤런트(talent)이다. 익히 알다시피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은의 무게나 화폐의 단위라는 본래의 의미 대신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가 재능으로 바뀐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부의 축적이 개인의 재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못마땅하기도 하다. 목자들의 해석처럼 달란트는 그 달란트를 부여한 절대주를 위해서 써야 되는 것이라면, 각자의 재능은 사익만을 위해서 써서는 안 된다. 재능은 사회적으로 얻어지기도 하므로 사회를 위해서도 써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샌델의 하버드대학 강의를 듣다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노력’이라는 재능을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논박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하버드대학에 들어오기까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성과는 개인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는 매혹적인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샌델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집에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어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분석결과를 들려준다. 사회적 구조도 개인의 노력에 영향을 끼친다.

신자유주의자 또는 경쟁주의 옹호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개인의 노력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노력을 통해 얻어진 재능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고, 그 재능을 통해 축적한 부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라는 달콤한 논리이다. 이 논리체계에서는 세금은 개인의 노력을 강탈하는 도둑질이라는 궤변도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재능이 출발선이나 기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달란트를 재능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고 동양사상에서 비슷한 것을 고르라 한다면, 첫음절의 음가가 ‘ㄷ’으로 서로 비슷한 덕(德)을 고를 수 있다. 덕에는 크다는 뜻이 있다. 능력 및 작용이라는 뜻도 있으며 베풀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은혜이기도 하며 복(福)이기도 하다. 본래 덕은 ‘바로 보다(悳)’라는 뜻과 ‘행한다(行)’라는 의미가 합쳐졌기에 이처럼 다채로운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재능이란 바로 보고 행함’이다. 당연히 옳은 일을 행하고 베푸는 것이 재능이다.

덕과 함께 짝으로 쓰이는 것이 업(業)이다. 업은 일을 뜻한다. 순서라는 뜻이 있고, 잇는다는 뜻도 있다. 그러다보니 기초라는 뜻도 있고, 공적을 뜻하기도 한다. 일을 조심히 하라는 뜻인지 두려움, 위태로움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일이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서구의 달란트와 좀 더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

불교가 한자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카르마(Karma)가 업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카르마는 일차적으로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힌두문명권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이 연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악행은 악행을 불러오고 선행은 선행을 불러오는 식으로 무한하게 연결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덕업을 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선행도 이러한데 하물며 이익을 밝히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경쟁에 기대어 경제행위를 하면 손해보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신이 쌓은 부가 오롯이 자기 노력 때문이라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 나쁜 영향이 있지는 않은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카르마는 윤회와 결합하면서 힌두문화권 특유의 지독한 사회계급체계를 낳았다. 자신이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는 지배층의 논리로 쓰인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사상도 욕심 많은 기득권에게 악용되면 사회전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민중이 끊임없이 주류나 상식이라는 지식체계를 곱씹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