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의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이 뚜렷하다. 90년대 후반 심은하-고소영-전도연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교차적으로 장악했던 트로이카 시기 이후, 연기력과 티켓 파워를 함께 갖춘 젊은 여배우들이 동시에 활약한 시기는 없다. 씨네21의 표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몇몇 여배우들의 농밀한 페르소나는, 몇 년 후 어김없이 책장의 어두운 칸으로 자리를 옮겼고, 대중의 온기 가득한 손은 남성 배우와 스타 감독의 차지가 됐다. 마지막까지 여배우 곁을 지키리라 믿었던 ‘삼촌들’ 역시 소녀시대의 젖가슴 사이에, 김연아와 손연재의 가랑이 사이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필자의 눈에는 잊힌 여배우들의 ‘화’와 ‘한’이 더욱 크게 보인다.

김소영은 “남성들은 더 ‘본질적’인 여자, 따라서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여성들과의 만남으로 보다 바람직한 남성성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그녀의 주장을 빌려, 충무로 여배우 기근현상의 속살을 들춰보자. 남성의 뜨거운 시선이 스크린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과 스포츠스타들에게 전면적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이다. 이 시기는 신권위주의 체제인 MB정권의 등장, 불평등의 심화, 심지어 가정 내에서조차 드러나는 경쟁 등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억압기제가 서로 맞물리며, 스스로를 도태된 삼포세대로 명명하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광범위한 확산을 가져온 때이다. “소녀”들을 향한 삼촌세대의 증가와 동시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의 스크린 속 여배우들은, 상처받은 가학적 남성 관객이 기대하는 ‘극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 소녀의 모습에 충실하지 않았다. 핫팬츠를 입고, “오빠, 소원을 말해봐.”라고 말하는 수동적이고 자학적인 소녀도 있었지만, 필자의 뇌리에는 자신과 딸을 학대하던 남편과 시어머니를 흉기로 내리치는 김복남(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2010), 딸과 함께 중산층 가정의 집을 빼앗으려는 주희(숨바꼭질, 2013) 등 남성보다 더 가학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뚜렷하다. 나아가, 납치돼 아저씨만을 기다리던 “진짜 소녀” 김새론(아저씨, 2010)은 자신을 괴롭히던 할머니와 의붓아버지를 죽게 만들거나, 감옥에 가게끔 어른들을 속이는 영악함을 가진 소녀로 성장한다.(도희야, 2014)

올해 개봉했던 문제작『도희야』를 좀 더 들여다보자. 도희를 도와주는 파출소장인 영남 역시 여성이다. 영남은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으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됐다는 점에서 도희와 소수자적 특성을 공유하며, 도희와 자연스러운 연대를 통해 마을(사회)의 부조리한 이데올로기에 대응한다. 도희와 영남이 기존의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들과 가장 뚜렷하게 대비되는 지점은, 비자발적 억압상황을 초탈하거나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특히, 도희의 경우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매일 밤 방파제에서 춤을 춘다. 잔혹함과 평화로움, 유머와 고통이 도희를 동시에 교차하며, 한국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 여성영화의 성장은, 역설적으로 젊은 여배우 기근 현상의 전후 맥락이다. 전통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 관객에게 의존했던 영화산업임에도 불구하고, 1960-90년대 중대한 여성문제였던 노동 착취는 한국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없었다. 문화 경합의 과정의 승자가 여성을 억압하고자 하는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여성권에 대한 대중의 보편적 이해의 확산은, 고무신 관객, 아줌마 관객, 손수건 부대 등 스크린 외부에 남아있던 여성 관객 비하 용어들마저 사어로 만들었다.

이제 주사위는 다시 관객의 몫이다. 충무로의 여배우들은 도태된 적이 없다. 그들은 시대가 원하는 여성 캐릭터를 훌륭히 표현했다. 순수와 섹시라는 양자택일의 유형에서 한 단계 발전했다. 필자는 더 잔인하고 악랄한 여배우와, 그녀를 노려보며 야무지게 팝콘을 깨무는, 배우보다 무서운 관객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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