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 405호 :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이들 모두를 살게 할 상생의 길 6월 3일, 아이들이 그렇게 간 지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불가에서 영가의 극락왕생이나 환생을 빌며 49재를 치르는 날이지요. 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라 해도, 하루종일 내리는 비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온갖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 곁으로 오기만 한다면 그까짓 등수가 무슨 상관이랴, 그다지도 하고 싶은 일을 왜 우린 그렇게 못 하게 했을까, 다시는 죽음에 이르는 경쟁에 들지 않게 하리라.

저는 그 40여일 동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공부했습니다(이미 그 일부는 여러분께 보여 드렸습니다만 조금 더 정확한 수치와 논리,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까지 정리한 충실한 보고서를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불평등으로 향하는 내재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300년에 이르는 장기 통계로 보여준 책이지요. 한 때 시장경제의 힘으로 물질적 풍요를 충분히 이룬다면,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를 활짝 꽃 피운다면 사람들 간의 불평등이 해소되어 훨씬 나은 세상이 오리라는 건 꿈이라는 얘깁니다. 해서 피케티의 책을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케티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이 낙관적 생각을 하게 된 건 1910년부터 1950년까지의 “외부쇼크” 때문입니다. 즉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과 대공황이 자산/소득비율(현재의 자산을 1년동안의 국민소득으로 표현하면 얼마나 될까)을 형편없이 떨어뜨렸고, 그 이후 95%가 넘는 소득세나 노동조합의 강화 등 강력한 분배/재분배 정책을 사회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다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벌어지기 시작해서 과거 가장 불평등이 심했던 유럽의 벨 에이포크나 미국의 도금시대(19세기말에서 1910년까지)를 방불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산의 수익률이 경제성장율을 상회하고(r-g>0, r은 수익률, g는 경제성장율)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테니(우리를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인구증가율이 떨어질 게 틀림없으니까요) 앞 날은 더욱 암담하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의 불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통계가 부실해서 장담할 순 없습니다만 한국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에 속했을 겁니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 지주계급을 소멸시켰고 고도성장으로 인해 자산보다 소득이 더 빨리 늘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에 발표된 한은과 통계청의 자료(“국민대차대조표”)로 피케티 비율을 계산한 결과 한국은 어떤 선진국보다도 자산/소득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우리가 최근 체험하는 것처럼 최상위 1%의 소득이 치솟고 자산불평등 역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상류층과 보통 사람들 간의 격차가 확 벌어지고 있는 거죠. 1970년대나 80년대에 비해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아이들이 요즘 누리는 풍요는 우리 땐 상상도 못할 수준이죠.
그런데 왜 아이들은 훨씬 더 불행해졌을까요? 그게 단순히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해서일까요? 아이들은 우리가 학생일 때보다 서너배는 더 공부합니다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몇십배가 될 겁니다. 혹시 피케티가 분류하는 상류층(10%)와 중산층(그 아래 40%), 그리고 하층(하위 50%)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떻게든 상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루저’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아닐까요? 과거에는 상중하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히 조선시대처럼 “신분의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할 만큼 벌어졌으니까요. 해서 우리는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노력해도 1등부터 50만등까지의 등수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지위 경쟁”은 끝이 없고 하위 50%는 말 그대로 하류층이 되고 맙니다. 우리 아이들 모두 사회라는 “세월호”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가만 있으라”(“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지요.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줄이면 됩니다. 피케티는 각 사회가 어떤 제도와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훨씬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피케티가 제안한 정책은 글로벌 자산세와 최고세율 80%의 소득세입니다만 평등을 이루기 위한 정책은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바로 새사연이 금년에 집중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새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글이 여러분께 전달될 오늘, 6월 4일이 지방선거 날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강화하겠다는 교육감 후보는 우리 아이들을 기어코 죽음으로 몰아넣겠다고 얘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이런 경쟁구도를 없애겠다고 얘기하는지 꼭 살펴서 투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세월호의 아이들을 잊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강요하는 현재의 경쟁 구도 하에서 우리 아이들 을 모두 살려낼 길은 불행히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