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403) 공감제로의 그들

위클리펀치(403) 공감제로의 그들

By | 2014-10-30T17:56:31+00:00 2014.05.13.|

위클리펀치 403호 : 공감제로의 그들공감과 집단의 양자관계에 대하여

5월이다. 신록이 아름다운만큼 스러져간 젊음도 안타까운 계절이다. 핏빛 광주에서 남도의 팽목항까지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다. 잔인한 5월, 분노가 넘실댄다. 광장에서, 인터넷에서, 마음에서 분노가 모이고 있다. 무엇보다 공감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 가장 많이 분노한다. 인간은 공감할 수 있는 기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고대 철학에서 인간 진화 역사와 뇌에 대한 과학까지 공감능력은 인간에게 내재된 기본 본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공감능력이 없는 것인가? 다른 것에 공감하고 있는가? 먼저 공감능력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맹자는 양혜왕을 만난 자리에서 제물로 쓸 소가 우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한 왕의 마음이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초라고 치켜세운다. 국민들은 비싼 소를 값싼 양으로 바꾼 왕의 쩨쩨함을 탓하던 차였다. 게다가, 양은 안 불쌍한가? 하지만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구하려 달려가고 눈앞에 우는 소가 불쌍한 그 측은지심이 왕도정치의 기본이라고 왕을 격려한다. 짐승에게도 자연히 흐르는 측은지심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함을 질타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지만 말이다. 거울뉴런이라는 것이 있다. 다른 개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운동과 언어 등을 담당하는 뇌영역이 활성화되는데, 이렇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시스템을 거울신경세포라고 한다.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타인과 동일한 행동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생물학적 토대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은 이런 생물학적 토대에 기초해 마음이론(theory of mind)를 갖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다른 존재)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의지와 지향에 의해 행동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3살이 넘으면 상대방이 나와는 다른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능력이 선천적으로 없는 아이는 마음맹(盲), 즉 자폐아가 된다.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역지사지하며 모방과 학습을 할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인 셈이다. 인간은 모두 미숙아로 태어난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으며 빠른 이동과 엄청난 손재주를 얻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좁은 산도(産道)는 피할 수 없었고 태어날 수 있는 뇌의 물리적 크기에 제약이 가해졌다. 진화는 뇌의 물리적 크기가 아닌 복잡한 시냅스 연결로 방향을 틀었고, 뇌의 완성에는 3년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해졌다. 이 갈등상황에 대한 인류의 선택은 공동육아였다. 미숙아를 낳아 3년 이상은 품에서 키울 수 있을 정도의 안정적 공동체가 존재해야, 뇌성숙에 시간이 걸리는 미숙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직립보행, 뇌의 발달, 미숙아와 공동육아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협동하고 공감하며 같이 살아가는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진화적 증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공감하지 못할까? 처참한 현실앞에 단상에서 내려와, 무릎꿇고, 눈을 맞추며, 손을 잡고 함께 우는 것이 왜 그리 힘들까? 이에 대해서도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일단 권력자의 지위에 올라가면 공감하는 능력이 크게 감소한다고 한다. 실험실에서 단순히 권력관계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공감능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또 다른 가설은 내집단/외집단 구별이다. 인간은 공감과 협력의 본성도 가지고 있지만 무리를 짓고 외집단을 ‘우리’와 구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단순히 같은 색깔의 셔츠만 입혀놓아도 다른 색 셔츠 집단과 공감하는 능력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상 공감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단에 대해서만 공감하는 것이 ‘그들’의 능력일 수 있다. 공감하지 못하는 지도자와 권력자를 가진 집단은 불행하다. 공자는 일생동안 지켜야할 단 한 가지를 묻는 질문에 ‘서(恕)’, 즉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의 처지로부터 남을 유추해 내는 것(推己及人)”을 든다.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은 나에서 출발하지만 개인의 이(利)에 머무르지 않고 공감의 능력을 눈앞의 가족에서 전체 구성원, 나아가 전 세계적 관점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역지사지,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1 개 댓글

  1. unwise 2014년 5월 28일 at 10:02 오전 - Reply

    공감하지 못하는 권력자도 문제지만, 공감하지 못하면서 공감하는 척 하는 정치꾼들이 더 큰 문제아닐까요? 공감하는줄 알고 지지하고 믿고 따랐는데 그런 자들에게 배신을 당하면 서민-중하위층들은 더 배신감을 느낍니다.

    노무현의 배신에 배신감+실질적인 고통을 받은 서민-중하위층들이 차라리 최소한 배신은 당하지 않을 새누리당을 찍는것은 아닐까요?

    입에 발린 소리하면서 맨날 노동자-서민을 얘기하는 인간들이나 부자 정당이나 똑같은 짓을 할것이라면 차라리 최소한 배신은 안하고 떡고물을 기대할 수 있는 부자정당을 선택하는게 합리적인 판단같은데요?

    공감하지 못하는 권력자도 위험하나, 더 위험한건 공감하는척하는 권력자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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