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을 때 많은 지지자들은 단순 명료한 해법을 갖고 있었다. 세금 더 걷어서 복지 늘리면 되는 것 아냐? 어느 사이 진보 세계 안에서 복지국가는 문제 해결의 상식적 기준이 되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꿈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복지국가 틀을 전제로 기본소득 등 보다 진전된 새 해법을 찾느라 분주한 모습들이다. 과연 복지국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전략적 목표 지점일까? 결론적으로 복지국가는 더 이상 대안 모델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복지국가는 수명이 다 되었다.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본 연재 여섯 번째 글에서 자본주의 황금기와 결부시켜 일부 다룬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복지국가 운명에 대해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지금부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역사상 가장 성공한 모델
유럽 무대로 꽃을 피운 복지국가 모델을 주도한 것은 좌파를 대표했던 사회민주주의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를 사상적 뿌리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지점이었다.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특별히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다분히 우연적 결과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선택을 둘러싸고 좌파운동가들 사이에서 종종 개량주의 시비가 일었지만 그것은 그다지 선택 여지없는 선택이었다.
몇 가지 지점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둘러싼 상황은 러시아 혁명가들이 직면했던 그것과 확연히 달랐다. 러시아에서와 달리 서유럽에서는 일반민주주의가 확립된 조건에서 기존 권력을 접수하는 것 이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관료 집단이 부르주아 계급과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고 있는 조건에서 국가를 무기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러시아와 달리 부르주아 계급이 강한 자생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붕괴하지 않았다. 민중이 러시아에서처럼 급진주의에 경도되지도 않았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유복한 상속자였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꿈을 필칠 수 있었다. 일반민주주의 확립 덕분에 합법적 수단을 이용해 인구 다수인 노동자들을 확실한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세 가지 전략을 적극 구사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제 영역에서 자본가 계급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대신 정치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강력한 산별노조가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는 생산이 증대하는 것에 비례해 고용이 확대되었고 노동이 균등화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산별노조 조직화가 매우 용이했다. 경제와 정치 영역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헤게모니의 균점은 사회민주주의를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계급대타협을 성사시켰다. 자본주의 황금기 도래와 함께 완전고용이 가능해진 조건에서 노동자 계급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본가 계급은 복지비용 충당에 필요한 증세에 적극 협력했다. 계급대타협은 각각의 계급 이해를 대변했던 서로 다른 정당들이 의회 안에서 타협과 협력의 정치를 구사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국가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시장이 여전히 자본가 계급 헤게모니 아래에 있는 조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를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국가 우위를 확보하는 것뿐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점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서유럽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황금기를 거치며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정부 재정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1970년대 후반 스웨덴 경우는 그 비율이 66%에 이르렀다. 이들 국가들 상당수가 공공지출의 60% 이상을 복지에 사용하였다. 사회복지활동 종사자는 공공부문 중 최대 고용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영국은 공공부문 40%, 스웨덴은 47% 정도가 사회복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
국민경제는 정부 재정 주도 아래, 정부 재정은 복지 지출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액면 그대로 복지국가가 확립된 것이다. 이전 시기 시장자본주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국가 주도 아래 경제가 돌아갔다는 점에서 노엄 촘스키가 지적한 대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 황금기 시기 복지국가도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경제는 활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시장은 적절히 통제되고 있었다. 금융자본 준동도 없었다. 복지 확대를 통해 소득분배가 꾸준히 개선되어 갔다. 복지국가는 그 어느 곳보다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었다.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체제 우월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최종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판정승이었다.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은 직접 체제를 경험한 당사자들이다.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한 나라들 중에서 사회주의로 되돌아 간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인구 다수가 원치 않았던 것이다. 반면 서유럽 복지국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기존 복지 체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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