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월가 금융자본은 여전히 과거 영화를 되새기며 반격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본디 신자유주의는 실물경제와 금융자본 사이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과잉 축적된 금융자본을 대거 파괴함으로써 실물경제와의 불균형을 상당 정도 해소했다. 하지만 금융자본은 실물경제보다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에 둘 사이 불균형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불균형이 심각해지면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논리로 무장한 채 재공격해 올 수 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를 보다 철저하게 이해하고 대비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도변밀한 전환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 대처 정부가 주도한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 이익 극대화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과잉 축적된 금융자본을 성장 동력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실물경제도 회복하고 둘 사이 불균형도 완화한다는 전략이었다. 혁명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 수준에서 발상을 전환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이 다투어서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할 이론 장치를 개발했다. 그들은 부자들이 더 부유해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투자 활성화로 모두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트리클다운 이론’을 펼쳤다. 이 이론은 기업 감세를 뒷받침해줌으로써 금융자본이 기업에서 보다 많은 이윤을 추출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인플레이션을 경제 최대 적으로 규정했다. 인플레이션을 수반하는 정부 경기부양책도 반대했다. 인플레이션으로 돈 가치가 하락함으로써 금융자본 이익극대화가 곤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들은 정부 재정 중심 경기 부양책을 반대하는 대신 ‘통화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중앙은행이 통화를 신축성 있게 공급함으로써 경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통화주의는 부자 증세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정부 재정 팽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장벽 구실을 했다.
또 다른 전략가 그룹은 신자유주의를 지구 전체로 확장시키기 위한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로서 나온 것이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였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전 세계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이를 관철시킬 전략을 담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안에는 탈규제, 긴축재정, 자본시장 자유화와 외환시장 개방, 국가기간산업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인수 합병 허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략의 또 하나는 개발도상국이 외환위기가 발생할 경우 이를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시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관철시킬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도개혁 성향 정권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도록 함으로써 국민들이 이를 개혁 일환으로 인식하고 지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묘하게도 외환위기를 전후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워싱턴 컨센서스 전략과 너무도 맞아떨어졌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은 일본 등 이웃 나라들 도움마저 냉정히 차단했다. 외환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이다. 한국 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제공받는 대가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전격 수용해야 했다. 또한 중도개혁 성향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은 이를 개혁 일환으로 간주하고 지지를 보냈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소름끼칠 정도로 공격적이면서도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졌다. 흐름을 주도한 자들은 자신들이 의도하는 대로 세상을 바꾸자면 어느 정도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과시했다. 그들은 낡은 관념의 포로가 되어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진보 세계를 마음껏 조롱했다.
실물경제 희생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면서 금융자본에 가해졌던 온갖 규제들이 철폐되는 조치가 잇달아 취해졌다. 금융자본은 기업에서 자유롭게 이윤을 추출할 위치를 확보했다. 막강한 자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인수합병 위협을 가해 기업을 굴복시킬 수 있었고, 주주총회를 장악해 자신들의 원하는 이사회를 구성하거나 경영진을 임명할 수 있었다. 말을 듣지 않은 경영자는 가차 없이 잘랐다.
이윤 획득 기회가 크게 늘면서 금융자본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본격 가동되자 미국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흥분한 일부 논자들은 미국 경제가 완전 새롭게 작동하기 시작했다며 ‘신경제’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1인당 실질 GDP 성장률이 오르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전성시대로 일컬어지는 1990년대 미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의 1인당 실질 GDP 연평균 성장률은 최악으로 기억된 1970~1980년대보다도 못한 바닥 수준이었다. 1970년대 미국 1인당 실질 GDP 연평균 성장률은 2.49%였다. 반면 1990년대는 2.02, 2000년대는 0.45로 수치가 더 떨어졌다.
1인당 실질 GDP 연평균 성장률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부유층 소득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20세기 초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소득 불평등은 자본주의 황금기를 포함하는 1945년 이후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득 불평등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1인당 GDP가 증가하는 조건에서 상위 계층 소득집중도가 높아졌다면 소득재분배가 상대적으로 덜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추가로 창출된 소득이 부자들에게 좀 더 많이 쏠렸을 뿐이라고 너그러이 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인당 GDP 증가율이 바닥을 기는 수준에서 상위 계층 소득집중도가 크게 높아졌다면 이야기는 완전 달라진다.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소득재분배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서민들 소득 증가는 억제하면서 소수 부자들 몫만 늘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1인당 GDP 증가율은 극히 저조한데 상위 계층 소득집중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추가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이는 소득불평등 악화 메커니즘과 깊은 연관이 있다. 통상 서민들 삶은 금융자본 보다는 근로소득을 발생시키는 실물경제 동향에 좀 더 직접적으로 의존한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 투자 활성화가 실물경제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랬을까? 이 점은 신자유주의가 기업 주가 상승을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되었는지를 살피면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미국 기업 경영자들이 주가 상승을 위해 동원한 대표적인 수단은 지속적인 구조조정, 초고배당, 자사주매입, 장기 기술개발 억제 등 네 가지였다. 지속적인 구조조정은 종업원읜 충성심과 작업 집중도를 떨어뜨렸다. 초고배당과 자사주 매입은 기업의 투자 능력을 약화시켰다. 장기 기술개발 억제는 기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 이 모두는 실물경제 기반을 침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실물경제를 희생시켰다. 서민들 소득이 늘어나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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