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상상을 허락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미국 상층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만큼 소련 붕괴 충격은 컸다. 어느 후진국 독재 정권이 붕괴된 것과는 차원이 완전 달랐다.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은 미국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초강국이었다. 더불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 반자본주의 사상을 물리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런 소련이 붕괴했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한쪽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 붕괴 충격으로 수많은 좌파 운동가들이 전망 없음을 선언하며 백기 들고 투항했다. 적지 않은 좌파 운동가들이 여전히 기존 관념을 고수하고 있지만 설득력과 영향력은 비교할 수 없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포기와 고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찰이다. 소련 붕괴 충격이 컸던 만큼 그것이 던진 메시지 또한 매우 의미심장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소련 붕괴 폐허 속에는 새로운 미래 실마리가 될 보석들이 널려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찾는데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중소 분열과 미국의 압박
소련 붕괴는 여러 가지 요인의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중 하나로서 중소 분열을 빼놓을 수 없다.
<공산당 선언> 마지막 구절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맺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핵심 명제 하나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개별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국제연대와 단결 없이 사회주의 운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에서 국제주의는 필수 요소였다.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 안에서 <공산당 선언> 마지막 구절을 조롱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중국 혁명을 다룬 다섯 번째 연재 글에서 중국과 소련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 적이 있다. 실제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분열 조짐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중소 분열 씨앗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바로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연대가 실현되자면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그러했듯이 단일한 지도권을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2차 세계대전 승리의 주역인 자신들만이 그 지도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중국은 소련의 지도권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이미 혁명 과정에서 소련의 지도가 자신들 실정에 맞지 않음에 따라 심각한 착오를 경험한 바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식민지 반식민지 나라들 혁명에는 중국 모델이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중국 지도부는 내심 자신들이야말로 세계 혁명을 지도할 최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중국 지도부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깊은 의구심을 품었다. 이 사실은 마오쩌둥의 첫 소련 방문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마오쩌둥이 군사 지원을 얻기 위해 소련 방문 의사를 밝힌 것은 1947년 말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길들일 목적으로 차일파일 미루었고 결국 방문은 2년 뒤에야 성사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 6일 열차를 타고 소련으로 갔으나 정작 조약 체결식을 한 것은 다음 해인 2월 21일이었다. 무려 90일만의 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마오쩌둥은 극도로 푸대접을 받아야했다. 대부분 기간을 스탈린과의 면담을 기다리는데 소모해야 했고 다른 나라 수반을 만나는 것도 차단되었다.
소련이 신생 중국에 제공하기로 한 원조도 마오쩌둥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막대한 보상을 지불해서 얻은 결과였다. 마오쩌둥은 비공식 합의를 통해 신장과 만주 지역 광물 채굴에 대한 독점권을 소련에게 부여했고, 중국에 파견된 소련 기술자에게 고액 급료를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아울러 중국 주재 소련인들에게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소련은 이후 덩샤오핑이 언급했다시피 자신들이 제공한 것보다도 많은 것을 중국에서 가져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 혁명 지도자들은 가슴 속에 깊은 응어리를 안게 되었다.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중소 두 나라는 후르시초프 등장과 함께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두 나라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두 나라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세계혁명 이론과 전략을 들이밀면서 설전을 벌였다. 중국은 1966년 8기 중앙위원회 11차 총회에서 소련을 사회제국주의로 규정하였고 소련은 중국을 반레닌주의적 대국주의로 응수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는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두 나라 분쟁은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국교 단절로 이어지고 말았다.
미국은 중소분쟁 사태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평화공존 전략을 바탕으로 소련 발목을 묶어둔 상태에서 중국 봉쇄에 모든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베트남전쟁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국 봉쇄 전략 역시 실패로 마감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궁지에 빠진 미국을 구출하는 천금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중국과 소련이 완전히 갈라졌다!
희대의 전략가 키신저가 1971년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해 두 나라 관계 개선을 타진했다. 중국은 전통적인 전략대로 먼 적(미국)을 끌어들여 가까운 적(소련)을 견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해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상하이 선언을 통해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선언하였다.
미국과 중국은 함께 손을 잡고 소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과거 중소 관계가 큰 문제없을 때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을 방어하는 아시아의 거대한 장막이었다. 소련은 그 덕을 톡톡하게 보았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 바뀌고 말았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긴 중소 국경선에 막대한 병력을 배치해 방어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대 접어들어 미국 레이건 정권은 소련 붕괴 프로그램을 본격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을 무한군비경쟁 게임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1983년 1월 16일 미국 UPI 통신은 레이건 정권 군사정책 방향을 정리한 문서인 〈1984~88년도 미국방 지침〉을 폭로하였다. 문제의 문서는 1982년 3월에 미국 군사 분야 최고위급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작성한 것으로 30여 명 고급 관료들에게만 배포된 그야말로 1급 극비문서였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대기권 우주 공간 신무기 체계를 개발하여 우주 공간을 새로운 전쟁의 장으로 하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그 목적을 위해서 미국은 우주 무기의 개발을 제한하려는 제안이나 조약은 거부한다.
– 1980년대 중반에 소련은 경제적으로 중대한 곤란에 처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상황을 이용해서 소련의 무기 체계를 일소해 버리도록 군비 증강 계획을 추진한다.
– 무제한 군비경쟁으로 소련의 경제 ․ 군사적 기반을 약화시켜 사회적 불안을 유도하며, 마침내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소련이 정치적으로 굴복해 들어오도록 만든다.
이른바 스타워즈 구상을 중심으로 추진된 무한군비경쟁 게임에 소련은 완벽하게 말려들어 갔다. 소련은 국민총생산 30% 정도를 군비에 쏟아 부으며 연신 과잉 출혈에 시달렸다. 소련의 체력은 갈수록 고갈되었다. (계속…)
*표와 그림을 포함한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아래의 pdf 파일을 다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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