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취업준비생들
설을 앞둔 어느 점심시간, 직원들은 저마다 어린 시절의 명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시골집 정경이나 손주를 보시고 반가워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세뱃돈 등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물론 모두가 명절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다. 그 중에서도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들은 특히 명절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작년 연휴 즈음인 2015년 2월에 취업연계 사이트 잡코리아에서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설문을 진행하였는데, 응답자의 67.6%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대답했다. 취업에 대한 부담감이 첫 번째 스트레스 요인이었으며, 취업하지 못해 떳떳하지 못한 처지가 두 번째 요인이었다. 취업에 대한 압박 때문에 명절 스트레스가 심화되는 것이다. 친척들이 지인이나 또래 친척의 취업소식을 전하는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 1.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명절대피소(출처 : http://www.pagoda21.com/event/eventIngDetail.do?pageIndex=1&num=128933&evt=ING)
이러한 취업준비생들이 증가하자 이번 설 연휴에는 그림 1과 같은 명절대피소라는 이름의 도피처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전국에 지점을 두고 있는 큰 규모의 어학원 중 하나인 파고다어학원은 명절대피소에 ‘대피’하고자 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전에 SNS를 통해 참가신청을 받았다. 신청에 성공한 청년들은 설 연휴 동안 대피공간을 주전부리와 함께 제공 받았으며, 추가적으로 취업 관련 진단검사와 토익 모의고사를 치를 수 있었다. 재치 넘치는 어학원의 홍보성 이벤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과거 시골길과 가족애를 추억하며 설을 기다리는 청년보다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압박이 심해진 청년이 늘어난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취업 다음엔 결혼, 결혼 다음엔 출산, 산 넘어 산
그렇다면 취업에 성공한 청년들은 명절을 기다리게 될까? 취업을 성공하게 되면 결혼 문제, 결혼 한 청년이라면 출산 및 육아 문제에 대한 걱정을 안고 명절을 맞이하게 된다. 만약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했다 하더라도 계약직과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얻었다면, 흔히 그 ‘다음 단계’로 여겨지는 결혼이나 출산은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감을 개인에서 가족으로 확대시키는 것이라 판단하여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누구는 잘 됐더라, 이럴 때일수록 더 노력해야한다는 ‘애정 어린’ 조언들은 어찌 보면 한 고비를 겨우 넘기고 난 뒤 첩첩산중을 만난 청년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청년들이 명절에 친척들의 조언에 상처받고, 스스로 잘된 가족들과 비교하며 처지를 비교하며 힘든 이유는 이제껏 일반적으로 여겨져 왔던 생애주기의 흐름이 상당히 느려졌기 때문이다. 평균적으로 교육을 받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길어졌기 때문에 사회인으로 첫 발을 딛는 연령대도 높아졌다. 또한 상당히 빠른 수준으로 오르는 물가 및 주거비용은 사실상 대출 없인 감당하기 어렵다. 이에 청년이 독립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자연스레 늘어나고 말았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시기임에도 부모세대의 기준에 너무 쳐지지 않고자 스스로를 담금질 하고 있지만, 마음에 차는 성과를 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위로도 어렵고 응원도 어렵지만 청년이 제일 어렵다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취업이나 결혼 및 출산이 어려운 이유는 경제 상황이 장기간 나아지지 않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로 인해 부모세대로부터 비교적 물질적·정서인 지지를 많이 받아온 현재 20대에서 30대 청년들의 기대에 비해 선택지가 좁아진 것도 있다. 교육수준이 높아진 청년들의 대다수는 대기업, 공기업, 공공 기관 등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청년 인구가 줄었지만 청년들이 바라는 좋은 일자리의 수는 더욱 줄어 경쟁은 훨씬 치열해 졌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를 더욱 힘들어 하는 것은 청년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오랫동안 안고 있었고, 그런 어려움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청년들의 두려움 끝에는 깊은 낙담이 자리 잡았고, 이는 ‘수저론’과 같은 신조어로 표현되었다. 이번 생애에서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다시 태어나 더욱 부유한 부모님, 혹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외모나 신체능력 혹은 지능을 가져야 한다는 자전적 조롱을 내포하고 있는 ‘수저론’은 ‘N포 세대’라는 단어보다도 한층 더 절망적이다.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조언보다는 진실한 공감과 고통 분담이 훨씬 절실하다. 실업문제를 비롯한 생활 전반의 청년문제는 세대의 차이가 아닌 오랜 시간 쌓여온 불안한 경제상황에 닥친 위기의 표출인 것이다. 청년들은 바로 앞선 미래를 책임질 경제주체들로서 위기상황의 맨 앞머리에 자리한 것뿐, 청년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언과 위로, 혹은 응원도 좋지만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를 장기적으로 이끌어갈 이들의 짐을 분담하고자 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청년들의 명절증후군은 우리 사회가 장기간 앓아온 아픈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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