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석춘입니다. 꼭 20년 전 연구원을 만들 때가 떠오릅니다. 2006년 2월부터 6년 동안 저는 연구원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회원 님들의 뜻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했습니다.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래글은 지난해 가을에 ‘범불교시국대회’ 요청으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회원님들께 보고 겸 공유하고 싶습니다.
1. 국민주권과 국민행복?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2017년과 2025년 두 차례의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을 파면한 한국 사회의 화두다. 1차 촛불혁명이 정치적 반동으로 귀결되었기에 더 그렇다. ‘한국사회 대전환을 위한 범불교시국회의’가 윤석열의 파면이 결정되기 전인 2025년 3월에 ‘탄핵 이후 전망과 사회대개혁’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한 평등한 커먼즈 사회”를 비롯한 정책 과제들을 제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터다.1 시국회의는 실천 투쟁에도 나서 2025년 4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틀 앞두고 오체투지를 감행했고, 윤석열 파면과 6월3일 대선을 거쳐 곧바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시국회의는 “파면과 민주당 집권 너머 새로운 사회와 불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사회대개혁과 불교개혁에 관한 담론 투쟁을 전개”하고자 9월부터 토론회 형식의 포럼을 열기로 했다.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어떤 한국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주제로 한 이 발제는 이미 3월에 한국사회 대전환을 위한 개혁 과제들이 진지하게 제시된 만큼 시국회의의 ‘담론 투쟁’ 취지에 맞춰 한국 사회와 정치 현실을 중심으로 ‘국민 대다수’의 눈높이에서 준비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없이 취임한 이재명 정부는 ‘국정기획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달 만인 8월13일에 청와대 영빈관에서 ‘국민 보고’에 나섰다. 그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함께 행복한 진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다”가 말했다. 그보다 보름 앞선 7월29일 백낙청은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를 제목에 넣은 책을 내며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재명만큼 준비된 대통령을 김대중 이후로는 만나본 적이 없다’2고 평가했다.
그런데 백낙청이 제기한 “나라다운 나라”는 ‘2017년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5년 집권 내내 사회 개혁에 우물쭈물했고 결국 그 뒤를 이은 것은 극우정권의 반동이었다. 백낙청은 ‘준비된 대통령’으로 김대중을 언급했지만, 우리가 경험했듯이 김대중 집권 5년도 민중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를 주제로 한 이 발제문이 ‘2025년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국가 비전’을 새삼 짚는 이유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주권 정부”를 자임하며 ‘빛의 혁명’과 ‘주권혁명’을 집권 이후 한층 내세우고 있다. 국정기획위원회에서 ‘국가 비전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았던 김호기는 “국가 비전의 다른 이름은 시대정신”이라며 ‘국민이 주인인 나라’는 국민주권을,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은 국민행복을 함의한다고 밝혔다.3 두루 알다시피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고,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이다.
헌법 제1조와 10조에 따라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에 나선다면 좋은 일이다. 국민주권과 국민행복,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발제자는 2020년에 낸 책의 마지막 장에서 “‘주권’과 ‘행복’을 더 많이 소통할수록 바로 그만큼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성숙”해간다고 강조했으며, 앞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신화’의 허구성을 규명한 책에서도 한국 정치의 과제로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공화국”과 “‘행복한 삶’의 혁명”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했다.4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08년 5월 정읍의 ‘황토현 동학축제’에서 열린 ‘전국NGO대회’에선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으로서 발제를 통해 “동학혁명의 발상지에서 국민주권운동과 주권혁명을 공식 제안”하고 ‘국민주권운동’의 논리를 담아 『주권혁명』을 출간했다.5
여기서 민망스레 과거를 언급하는 까닭은 ‘국민주권’이나 ‘주권혁명’의 ‘저작권’을 내세울 의도가 전혀 아니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에서 그 말을 자기들의 ‘정치 언어’로 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사실, 처음도 아니다. 발제자가 일했던 싱크탱크에서 2012년에 낸 『리셋코리아- 18대 대통령이 꼭 해야 할 16가지 개혁 과제』6에서 처음 제안한 ‘소득주도성장’을 2017년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전면에 내세웠다. 문제는 저작권이 아니라 소득주도성장을 내걸면서도 함께 제시된 경제구조 개편과 복지정책의 확대―예컨대 부자증세나 주거의 공공성 강화―는 아예 외면함으로써 개혁 실패는 물론 되레 ‘반동을 부른 악몽이 ‘국민주권 정부’에서 되살아날까 우려를 금할 수 없어서다.
간략히 밝혔듯이 발제자는 ‘주권’과 ‘행복’의 정치경제적 의미가 민중들 사이에 많이 퍼져갈수록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다고 확신해 왔다. 국민주권운동과 주권혁명의 관건은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라고 주장해 온 까닭이다.7 오늘 발제에서 제안하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도 그 연장선에 있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행복한 사회’로 한국 사회를 만들어가려면 정말 ‘국민주권 시대’가 열렸는가부터 차분히 짚어야 한다.
2.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를 논의하며 ‘국민’이 아니라 굳이 ‘민중’을 쓴 까닭은 그 말을 우리 사회가 시나브로 잃어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친일과 친군부의 과거를 지닌 언론이 그 말에 ‘운동권 용어’라는 굴레를 덧씌우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쓰지 않는 말’이 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민중’이라는 말이 공론장에서 배제될 때, 다름 아닌 민중의 삶이 그만큼 더 고통에 잠길 수 있어서다. 민중 사이에 연대 의식이 낮아지면서 각자도생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주권 정부’에서도 ‘민중’이 기피된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국민주권 시대’를 열어갈 주체가 정부와 집권당으로 오해될 수 있음은 물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갈 때 치명적 한계가 될 수 있다.
국민과 민중은 개념이 다르다. 현대 언어철학과 정치철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거론하는 까닭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현실 인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링컨이 연설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민주주의에 대한 간명한 정의처럼 여겨왔지만 오역이자 왜곡이다. 원문은 “the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이다. 분명히 ‘nation(국민)’ 아닌 ‘the people’이다. ‘국민’이라는 번역어는 원어의 의미, 곧 링컨의 생각과 맞지 않다. ‘국민’은 말 그대로 국적을 지닌, 또는 국가에 귀속된 모든 사람이다. 피플(people)의 번역어로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
‘people’은 라틴어의 ‘populus’라는 말에서 비롯했는데 역사적으로 의미가 변화되어 왔지만, ‘피지배자’라는 의미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지녀 왔다. 고대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지배 아래 억압받고 착취당하면서도 직접 생산에 나섬으로써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문화의 창조를 떠받쳐온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이 피플이다.
피플은 시민 혁명을 거치면서 피지배자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영어의 그 말에 가장 적실한 우리말은 ‘민중’이다. 물론 현재 영어권에서 통용되는 ‘피플’은 ‘사람들’로도 ‘민중’으로도 옮길 수 있다. 다만 ‘the people’처럼 ‘the’를 붙일 때는 민중의 의미를 분명히 담고 있다. 캠브리지 사전에서 ‘the people’은 ‘사회에서 권력을 갖지 못한 대다수의 평범한 남성과 여성들(the large number of ordinary men and women who do not have positions of power in society)’로 풀이되어 있다. 우리 국어사전의 민중 풀이인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을 이른다”와 일치한다. 한국의 기득권세력이 늘 준거로 삼는 미국의 헌법도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로 시작한다.
링컨의 말이 처음 한글로 옮겨졌을 때 그것을 ‘인민’으로 번역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강점한 시기였는데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로 옮겼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은 제헌 헌법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초안은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었다. 법학자 유진오가 주도해 마련한 제헌 헌법의 초안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그런데 제헌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인민’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는 국회의원들이 “38선 이북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인민’이란 말을 왜 우리 헌법에 쓰느냐”고 아우성쳤다.
기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법제처장을 지낼 만큼 전혀 좌파가 아니었다. 친일 행적도 또렷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성전’으로 찬양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학병에 나가라고 촉구도 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초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한 이유는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법리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적실하기 때문이다. 결국 색깔 공세가 거세지면서 대한민국 헌법 초안의 ‘인민’은 ‘국민’으로 바뀌었다. 두고두고 ‘학자적 양심’으로 꺼림칙했을까, 유진오는 회고록에서 ‘인민’이 ‘국민’으로 바뀐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8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빼앗긴 셈이다.”
유진오의 증언처럼 공산주의자들이 쓴다고 해서 그 “좋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그 말을 빼앗기게 된다. 단순히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에 담긴 민주주의 철학마저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던 1970년대와 80년대 들어 ‘민중’은 크게 퍼졌다. 하지만 ‘1991년 동아사태’를 계기로 ‘민중’이란 말이 당시 가장 ‘권위지’였던 동아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에서 시나브로 사라졌다.9 유진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인민에 이어 민중이라는 ‘좋은 말’까지 빼앗긴 셈이다.
1990년대 들어 시민운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민주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민중’이라는 말을 두고 ‘저항적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영어 ‘피플’도 마찬가지이다. ‘피지배자’라는 뜻과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뜻이 모두 담겼지만 차차 후자 쪽 의미가 강해져 온 것이 영어권의 역사였다. 기실 민중이라는 말에 저항적 이미지가 있다면, 오히려 더 좋은 말이다. 권력을 감시하며 부당한 지배에 저항하는 정신이 민주주의 아닌가.
냉철히 살피면 주권을 담은 헌법 제1조는 논리적 모순이다. 국민은 ‘권력이나 자본을 지닌 극소수’와 대다수인 민중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할 때, 논리상 그 ‘국민’은 권력을 지닌 사람일 수 없다.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권력이 나온다’로 해석해야 옳다. 한 국가의 모든 권력은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닌 국민, 곧 민중(더 피플)으로부터 나온다는 게 ‘국민주권’의 헌법정신이다. 헌법 제1조 ②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할 때, 논리상 그 ‘국민’은 권력을 지닌 사람일 수 없다. ‘권력이 없는 민중으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로 해석해야 옳다.
아울러 제헌 헌법부터 일관되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굳이 그 권력 앞에 ‘모든’이라는 관형사를 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을 때, 대다수는 그 권력에 ‘정치권력’만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모든’이 들어간 까닭은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다른 권력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이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버금가거나 으뜸인 경제 권력이 있고, 사회 권력과 문화 권력도 있다. 알다시피 법률, 더구나 헌법에 들어간 낱말인 ‘모든’은 모호한 수식어가 결코 아니다. 사전 풀이 그대로 “빠짐이나 남김이 없이 전부”를 뜻한다. 그러니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모든 권력, 바로 그 모든 것이 권력이 없는 국민, 곧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뜻이다.
정치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듯이, 경제 권력은 노동인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대학의 권력은 대학생들로부터 나와야 하고 언론의 권력은 기자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대학에서도 권력은 학생들로부터 나와야 옳다. 실제로 노르웨이에서 교수를 새로 임용할 때 선발 채점권을 기존 교수에게 1/3, 대학생 대표에게 1/3, 대학원생 대표에게 1/3을 준다. 반면에 한국 대학생들은 자신의 학과 교수 선발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다. 기존의 학과 교수들이 선발해서 1, 2, 3위 명단을 재단과 총장실에 제출한다. 서로를 존중한다면 학과에서 1위로 올리는 후보를 임용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기존 학과 교수들이 1/3, 사립 학교 재단이 2/3 비율로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좋게 보아서 그렇지 실상은 재단이 결정한다. 노르웨이 대학과 정말 큰 차이가 난다. 노르웨이 대학에선 학생들이 2/3를 차지하니까 학과 교수 선발권을 사실상 이들이 지닌다. 노르웨이에서 대학생들은 전혀 학비를 내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들 대부분은 등록금으로 운영되니, 당연히 참여 비율이 더 높아야 할 텐데 정반대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런 사실들을 한국 대학생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극소수가 알고 있지만, 그들조차도 그것을 한낱 ‘정보’의 하나로 여기기 십상이고 문제 해결 의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학을 구체적 보기로 들었지만, 무엇보다 경제 권력이 강력하다. 기업의 각 조직에서 최고 의사 결정권은 아래로부터 올라오지 않는다. 그나마 정치권력은 투표를 통해 위임이라도 받았지만 기업은 물론 사립 대학과 언론사는 전혀 아니다. 기업의 자본가처럼 사립대학 재단 이사장이나 언론사 사주는 명색이 ‘지식인’ 조직에서 왕처럼 군림한다.
따라서 헌법 1조의 표현에 근거해 ‘국민주권’이란 말을 쓸 때 적어도 ‘모든 권력’과 ‘국민’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새겨야 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때 논리적으로 그 국민은 권력이 없는 ‘일반국민’, ‘국민의 대다수인 민중’으로부터 나옴을 의미한다는 민주공화국의 철학을 잊을 때 ‘국민주권’이라는 말은 자칫 내용 없는 텅 빈 기표가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대한민국 정부 기관(국가법령정보센터)이 공식적으로 밝힌 헌법의 영문은 1조 2항에서 “The sovereignty of the Republic of Korea shall reside in the people, and all state authority shall emanate from the people”이라고 써놓았다. 그 영문을 한글로 옮기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주권은 민중(the people)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밖에서는 주권이 “the people(민중)”에게 있다고 ‘과시’하면서, 정작 주권자들에겐 “국민”이라고 좁혀 놓은 셈이다.
국민주권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 갈 사회가 왜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인지 명확해졌다면, 다음은 ‘국민 행복’ 아닌 ‘민중 행복’, 그러니까 ‘민중이 행복한 사회’다.
3. 민중이 행복한 사회
한국인은 행복하지 않다는 통계 뉴스가 잊을만하면 신문과 방송을 탄다. ‘국민주권’을 외치며 민중들이 촛불과 응원봉 시위를 한창 벌이던 2025년 3월19일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웰빙연구센터, 갤럽과 함께 ‘2025년 세계행복보고서(WHR)’를 발표했다. 147개국을 대상으로 전반적인 삶의 질을 평가해 매긴 순위에서 한국은 58위를 기록했다. 전년도 52위에서 6계단 하락한 수치다.
사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를 논의하려면 정확한 현실 인식부터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은 집권할 때도 그랬고 물러나서 책방을 하고 있는 지금도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며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한국 사회는 자살률 1위, 연간 노동시간 1위, 비정규직 비율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에 출산율은 꼴찌인 사회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가 불행한 사회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다만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발제자는 한국 사회에 ‘3포세대’라는 말이 퍼져갈 때 의문이 들었다. 요즘도 ‘청년실업’이나 ‘20대 남성 우경화’라는 말을 언론이 퍼트린다. 하지만 모든 20대가 결혼을 망설이거나 주거에 고심하거나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여론 조사 기관인 글로벌리서치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의뢰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는 젊은 세대를 일괄적으로 뭉뚱그리는 분석이 얼마나 잘못인가를 단숨에 깨우쳐 준다. 삼포 세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부유한 집안의 20대는 희망이 넘친다. 10명 중 9명꼴인 89.6%가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반면 가난한 20대는 단지 32.1%만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이생망, 삼포 세대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20대를 일러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해지리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세대’라고들 말하지만, 경제적 상위층의 젊은이들은 ‘단군 이래 가장 희망과 경쟁 의욕에 가득 찬 세대’이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라는 발제 주제와 관련해서도 흥미롭다. ‘연대와 협력이 우선시되는 사회’와 ‘경쟁과 자율이 우선시되는 사회’ 중 “현재 귀하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어느 것에 가깝습니까?”에 응답 차이는 또렷하다. 부유한 20대의 절반이 ‘경쟁과 자율이 우선시되는 사회’를 선택했다. 부유한 집안의 20대들은 그렇지 않은 집안의 20대들과 달리 각자도생의 경쟁 체제를 적극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상층과 하층이 바라는 사회는 정반대의 모습이다.10
세대를 떠나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자산 규모에 따라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 다르다. 2018년 기준으로 자산이 6억 원 이상인 ‘국민’들은 44.1%가 한국 사회의 경쟁체제가 지속되기를 원한다. 6억 원 미만에서는 경쟁과 자율보다 연대와 협력이 우선이라고 응답했다. 바로 그들이 민중이다.11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 한 1997년에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은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의 ‘20대80 법칙(Pareto principle)’을 새롭게 구성했다. 19세기 영국 사회를 연구하던 파레토는 인구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마르틴과 슈만은 세계화 시대에서 전 세계 인구 중 20%만이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반면 대다수인 나머지 80%는 사실상 20%에 빌붙어 살아가야 한다고 분석했다.12 빈곤층 80%와 부유층 20%로 사회가 구조화되는 양상은 한국의 ‘교육 세습’ 이나 ‘부동산 소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대 80사회에서 모든 권력은 그 20에서 나온다. 국민통합은 20(부익부)대 80(빈익빈)으로 나눠진 현실을 외면하고 이뤄질 수 없다. 그럼에도 80%는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는 반면에 20%의 국민은 눈덩이처럼 재산을 축적하는 사회에서 ‘국민통합’이나 ‘국민행복’, ‘함께 행복’들을 주장한다면 위선 또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권리가 절실한 사람들도 20이 아니라 80이다.
한국 사회는 조중동 신방복합체가 복지를 포퓰리즘으로 몰아가 그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거나 ‘복지’의 뜻을 새기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복지의 국어사전 풀이를 보면 사뭇 신선하다. ‘행복한 삶’이 바로 복지다. 복지는 보수든 진보든 ‘20%’들에겐 가볍게 다가올 말일 수도 있겠지만, 경제적 생활이 고통스러운 민중들에겐 결코 무시나 경시의 대상일 수 없다.
국민의 80%는 각자도생의 경쟁체제에서 생존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른바 ‘중산층’도 언제 ‘일가족 비극’을 맞을지 모른다. 국민의 80%, 바로 민중이다. 다른 사람 위에 부와 권력, 명예로 군림하지 않고 ‘갑질’하지도 않고―국민의 20%와 달리―자신의 노동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를 ‘민중이 행복한 사회’로 규정한 의미가 여기 있다.
4. 민중역량 강화의 길
1) 자본의 지배력과 이데올로기
국민주권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를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와 ‘민중이 행복한 사회’로 제시한 까닭은 국민주권과 국민행복을 국정 비전으로 내건 ‘촛불혁명 2기 정부’에 견제와 견인이 요구되고 시국회의가 자임한 ‘담론투쟁’도 염두에 두어서이다. 이재명 정부의 5년 청사진으로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주권과 국민행복’론에서 빠져 있는 것은 주체다. 국민주권운동의 주체가 민주당 정부일 수는 없다. 그것은 국민주권의 의미와도 배치된다. 국민주권이든 국민행복이든 주체는 민중임을 재확인하는 까닭이다.
유의할 것은 주권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다. 더러는 민중 개념이 모호하다고 주장하지만 ‘20대 80의 사회’에서 80에 들어있는 노동인‧농민‧자영업인‧빈민‧실업인‧청년들을 함께 호명하는 개념이 ‘민중’ 외에 무엇이 있을까 반문하고 싶다. 더러는 ‘민중’이 학문적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중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이 내놓은 개념은 명료하다. “민중의 가장 근원적인 존재성”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 주체에서 비롯되며, 민중이 모순을 느끼고 그에 저항하는 지점도 일상의 층위”이다. 그래서 민중은 “특정한 계급연합으로 실체화되는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구성과 정체성을 내포한 다성적 주체”이다.13 민중이 ‘종속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임은 앞서 설명했듯이 ‘people’이 ‘피지배자’라는 의미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는 두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권운동과 주권혁명의 주체로서 민중 개념 또한 다르지 않다.
바로 그렇기에 주권운동의 관건은 ‘민중 역량’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평등이 만연할 때 자본의 살천스런 이윤 추구 논리 앞에서 단결 또는 연대해야 할 민중은 분열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전문직과 일반직,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정규직과 실업인 사이의 불평등이 ‘정보 불평등’과 악순환을 이루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인 만큼 자본의 지배력은 민중의 삶 전반에 걸쳐 작동하고 있다. 언론인들을 통제하는 것은 언론 자본이고, 사립대학의 교수들을 관리하는 것은 대학재단이다. 언론자본가나 대학재단 이사장은 그 자신이 자본의 구성원으로서 대자본의 이해관계를 대체로 대변한다. 한국의 정규직 언론인과 사립대학의 전임교수들 대다수는 이미 상위 20%에 들어 있거니와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체제에 친화적이다.
체제에 친화적인 신문과 방송, 대학이 ‘권위’―한국 사회에서 그 실체가 상당히 벗겨지고 있지만 아직도 강력한 권세―를 지닐 때 사회 전반에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퍼지게 마련이다. 그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알튀세르가 경고했듯이“어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의식도 자기 자신의 내부적 변증법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속에 지닐 수없”14기에 더 그렇다. 한국의 불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영남 지역에서 탐욕을 부추기는 체제에 무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은 현실은 사부대중들이 진지하게 새겨볼 문제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언론과 대학 못지않게 강력한 이데올로기 기구가 있다. 목사 전광훈이 상징하는 기독교 교회다. 비상계엄 국면에서 전광훈이 선동하고 서울서부지법 난동이나 태극기부대 집회에서 미국 성조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서 헌법 제1조의 ‘국민주권’을 외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우스개로 넘길 수 없는 그 장면들은 ‘국가주권’이 얼마나 희화화될 수 있는가와 함께 민중 역량 강화가 왜 중요한가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문재인 정부에 이어 이재명 정부마저 언론개혁과 대학개혁을 소홀히 할 때 ‘국민주권 시대’는 허망한 결과를 맞을 수 있다. 물론, 두 차례나 촛불혁명을 일으킨 민중의 역량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권 교체에서 머물 때, 민중 역량은 ‘깨시민’의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민중 역량의 과소평가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문제는 자본의 지배력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2) 민중의 고통과 ‘사회적 깨달음’
민중의 역량 강화에 언론과 대학이 큰 걸림돌이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영원한 굴레는 결코 아니다. 알튀세르도 강조했듯이 민중의 의식은 “자기와 별개인 것에 대한 근원적 발견에 의해서 현실에 가닿을”수 있다. 더구나 민중들은 일상생활을 통해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체제의 문제점을 정확히 또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기실 출산율 꼴찌에 연간 노동시간 1위, 비정규직 비율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 자살률 1위의 통계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고통이다. 흔히 불교의 고통은 사회적 고통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이야기하지만 고정관념이다. 출산율, 노동시간 과 비정규직 비율, 산업재해(현장에서 사망 못지않게 병을 얻어 사망), 자살의 통계는 고스란히 생로병사의 고통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는 원대한 서원을 지닌 불교는 중생 곧 민중이 부여안은 생로병사의 고통을 직시할 수 있다. 불교학 정립에 열정을 바친 고 김성철은 “진정으로 불교적인 신행 활동”은 “정치, 경제, 사회적 보살행”과 이어진다고 강조했다.”15 발제자는 그것을 ‘사회적 깨달음’으로 제안한 바 있다.16 사회적 깨달음의 전제 없는 깨달음의 사회화는 정치사회적 울림이 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회적 깨달음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불교 경전에 나타난 이상 사회는 “중도의 지혜로 가난한 사람에게 생존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현대의 북유럽국가보다 훨씬 강한 수준의 복지국가”17이다. 청정한 수도승 적명 스님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강요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사람을 기쁘고 자유롭게 해 주는 것 말고 달리 불법 행함이 없다”18고 간결히 법문했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각자도생 체제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삶이 기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다.
민중의 힘이 커지면 ‘20대 80 사회’의 ‘20’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연민을 가질 수 있다. 탐진치(貪瞋痴)의 질곡을 벗어나도록 구제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소득과 자산 상위 20%에 대해 누진세와 종합부동산세 강화는 물론 순자산 100억 이상 보유자19에는 ‘부유세’를 신설해야 한다. ‘부유세’의 이름을 ‘자비와 사랑의 실천금’이나 ‘두레기금’ 혹은 ‘연대기금’으로 붙일 수 있고 그것이 세금을 내는 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임을 적극 알릴 수 있다. 물론 상위 20% 가운데 많은 이들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싸움에 나서겠지만, 끊임없는 소통으로 공감대를 넓혀가는 동시에 과감한 증세로 모든 민중이 생존권 위협 없이 자아실현을 해나갈 수 있는 체제를 구현해가야 옳다.
여기서 관건은 민중 역량이다. 일찍이 붓다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임제선사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전했다. 주권운동의 주체인 민중의 자기역량 강화에 좋은 법문이다. 두 법문 모두 촛불혁명에 나선 민중들의 역량이 한 단계 더 나아가는데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 ‘민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행복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민중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회는 ‘K-민주주의’를 넘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닐 터다.
5. 나가는 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에 원천적 장애는 인류세의 위기일 수 있다. 인류의 지구적 생존 자체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인류세의 위기가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해결이 가능할까에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이 발제가 자본의 지배력과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서 사회주의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불교와 사회주의를 결합하자는 운동은 20세기부터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현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사회주의를 말할 때 그것이 ‘어떤 사회주의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답이 명쾌하지 않다면 마르크스 철학의 문제의식을 살려 깊이 공유하는 수준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20 예컨대 ‘잠정적 유토피아’21라든가 ‘민중이 주도하는 지구화’와 같은 담론들을 적극 공론화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신(神)’이 된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을 민중 현장에서 모색한 보에르스마는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민중 주도’로 “현실적 담론들과 더불어 정밀한 해결책들을 예시하고, 제안하며 구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22
모든 권력이 국민 대다수인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 그러니까 입법‧행정‧사법부의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고 기업‧대학‧언론 등 모든 조직의 권력(의사 결정권)이 아래로부터 나오는 사회, 증세를 통해 복지제도를 획기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민중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도 현재의 민중 역량에서 쉽지 않은 과제이다. ‘조중동 신방복합체’가 교수들을 동원하며 나름의 ‘권위’를 지니고 끊임없이 각자도생 체제를 정당화하는 ‘여론’을 형성해가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렇다.
흔히 K-민주주의를 자부하지만, 촛불혁명으로 두 차례나 정권을 교체했다고 곧 세계적 의미가 따라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반동 정권을 부른 문재인 정부가 반면교사다.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를 실현할 때, 비로소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프랑스혁명도 러시아 혁명도 이루지 못한 이상이다. 그 사회는 자연스레 ‘민중이 행복한 사회’가 된다. ‘모든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오는 사회’와 ‘민중이 행복한 사회’는 역량이 강화된 민중에게 둘이 아니다. 시국회의가 전개해 갈 ‘담론 투쟁’에 작은 참고자료 하나가 되었기를 바라며 발제를 마친다.
- 이도흠, “퇴진 운동의 주/객관적 조건과 탄핵 이후 사회대개혁의 길”. 한국사회 대전환을 위한 범불교시국회의 토론회 2025년 3월 20일.
- 백낙청,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 나라다운 나라를 어떻게 만들까』, 창비, 2025, 301~302쪽.
- 김호기, 국민주권과 국민행복의 새로운 대한민국을 소망한다, <대한민국정책브리핑> 2025년 8월14일.
- 손석춘, 『새내기 주권자를 위한 투표의 지혜』, 철수와영희, 2020; 손석춘, 『박근혜의 거울 – 왜곡된 반사 또는 부풀려진 신화』, 시대의창, 2011.
- “주권운동은 정치, 경제 뿐 아니라 노동운동은 노동주권, 농민운동은 식량주권, 환경운동은 환경주권 등을 의제로 제시하는 각 부문별 활동과 연대의 틀로 구성돼야 한다”며 “그 시작은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나온다는,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찾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재환, “정치개혁과 국민참여로 주권혁명”, <시민사회신문> 2008년 5월19일 ; 손석춘, 『주권혁명』, 시대의창, 2008.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리셋코리아- 18대 대통령이 꼭 해야 할 16가지 개혁 과제』, MSD미디어, 2012.
- 이재환, “정치개혁과 국민참여로 주권혁명”, <시민사회신문> 2008년 5월19일; 손석춘, 『주권혁명』, 시대의창, 2008.
- 유진오, 『헌법 기초 회고록』, 일조각, 1989.
- 손석춘. “언론개혁 운동의 성찰과 전망”, 『경제와사회』, 비판사회학회, 2021; 더 자세한 설명은 손석춘, 『미디어리터러시의 혁명』, 시대의 창, 2021 참고.
- 더 자세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 손석춘, 『손석춘교수의 민주주의 특강』, 철수와 영희, 32~36쪽.
- 통계청이 올해(2025년) 2월 내놓은 ‘국민 삶의 질 2024’ 보고서를 보아도 차이는 확연하다. 2023년 한국인 삶의 만족도는 OECD 38개국 가운데 33위를 차지했는데 주목할 것은 소득이 100만원 미만인 가구의 삶의 만족도는 5.7점으로 평균(6.4점)보다 0.7점 낮았고, 소득이 100만∼200만원 미만인 가구는 6.1점, 200만∼300만원 미만인 가구는 6.2점이었다. 반면에 소득이 600만원 이상인 가구의 만족도는 6.6점으로 평균을 상회했다. 국가통계연구원, “국민 삶의 질 2024” 통계청, 2025, 123쪽.
- 마르틴‧슈만, 『세계화의 덫』, 강수돌 옮김, 영림카디널, 2003, 제1장 참고.
- 역사문제연구소, 『민중을 다시 말한다』, 역사비평사, 2013.
-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옮김, 후마니타스, 2017, 250쪽.
- 김성철,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불교도의 역할」, 『불교학연구』 21권, 불교학연구회, 2008, 409쪽.
- 손석춘, “지속가능한 발전과 불교적 이상사회”, 한국불교학 91, 2019.
- 윤성식, 『부처님의 정치수업-부처님의 지혜로 설계하는 대한민국 정치』, 불광출판사, 2017, 209쪽, 117쪽.
- 적명, 『수좌 적명―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유고집』, 불광출판사, 2020, 36쪽.
- 기준은 공론화 과정을 통해 변경할 수 있다. 순자산 100억 기준은 2025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공약이다.
-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손석춘, 『우주철학서설: 어둠의 인식론과 사회철학』, 철수와영희, 2022.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비판적으로 이어갈 철학적 모색의 하나로 과학적 존재론과 인식론에 기초한 사회철학을 제안했다.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책세상, 2011.
- 프란시스코 보에르스마, 『가난한 사람들의 선언 – 사회연대경제, 아래로부터의 대안』,박형준 옮김, 마농지, 2020.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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