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쥐가 치즈를 얻는다’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일까. 치즈를 얻으려고 앞장섰던 쥐가 쥐덫에 걸리고 나면 뒤따르던 두 번째 쥐가 손쉽게 치즈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너무 앞서가지 말란 뜻이 담겼다.
“우리는 기꺼이 첫 번째 쥐가 되려 한다.”
건 누구의 말일까. 영국 폴리시랩(정책실험실) 책임자인 안드레아 시오드목(Andrea Siodmok)이 지난달 11일 한국에서 열린 정부혁신포럼을 찾아 한 말이다. 다른 누군가가 치즈를 얻을 수만 있다면 비록 쥐덫에 걸리더라도 기꺼이 아무도 가지 않은 낯선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폴리시랩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니까 폴리시랩은 끊임없이 쥐덫에 걸릴 첫 번째 쥐를 등 떠밀어 내보내는 곳인 셈인데, 그 첫 번째 쥐가 바로 ‘정책 실험’이다.
[* 폴리시랩(Policy Lab) : 2014년 ‘열린 정책 수립’을 목표로 시민 서비스를 개혁하려는 계획에 따라 영국 국무조정실(Cabinet Office)에 설치한 정부 기구다. 시민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정책의 효과를 높일 방안을 찾고자 여러 정부 부처와 함께 많은 정책 실험을 해오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정부 부처들을 아우르는 정책 혁신을 위한 실험 공간으로 기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책 실험 비용, 아까워 할 일이 아니다
2016년 1월부터 2년간 핀란드에선 기본소득 정책 실험이 진행되었다. 정부가 주도한 대규모 기본소득 실험으로선 전 세계에서 처음이었다. 목표는 더 나은 사회 안전망 체계를 마련하는 것. 핀란드 정부는 노동 조건이 변함에 따라 나타나게 될 ‘새로운 필요’를 해결할 더 나은 정책을 찾아야 했고, 복잡한 체계에 들어가는 행정 비용과 관료주의를 손볼 방안도 찾아내야 했다. 여기에 더해 기본소득이 정말 삶의 질을 나아지게 하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다달이 약 72만 원의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고용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실험은 실업수당을 받는 17만 5000명 가운데 무작위로 2000명(25~58세)을 뽑아 진행했는데 기본소득이 주어지는 만큼 이들이 임금이 낮은 일자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것이 이번 정책 실험의 기본 가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2000명(나머지 17만 3000명이 대조군이다)에게 조건 없이 달마다 72만 원을 지급하는 정책 실험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올해 초에 발표하기로 한 실험의 최종 보고서가 아직 발표되지 않아 결과를 단언하긴 어렵지만, 지난해 2월 실험을 주관했던 핀란드 사회보험국이 2년 치 자료 가운데 절반을 분석한 예비 보고서에 따르면 기대했던 것과 달리 고용률은 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선 ‘기본소득이 고용률을 끌어올리는 유인으로 작용할 것’이란 가설이 틀렸을 수 있다.
예비 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소득을 받은 집단(실험군)이 그렇지 않은 집단(대조군)에 견줘 2017년 한 해 동안 평균 반나절(0.5일) 가량 더 일을 많이 하긴 했지만 연구팀은 이 차이가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자 한국의 몇몇 언론은 이를 두고 실험이 실패했다는 제목을 뽑아 기사를 내보냈다. 가령, 한국경제는 이렇게 제목을 뽑았다.
“월 560유로 기본소득, 실업 해결에 효과 없어”…핀란드, 실험 실패 최종 결론(한국경제, 2019.2.9.)
먼저, 예비 보고서는 ‘최종 결론’이 아니니 이는 오보라 할 만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만약 최종 결과도 예비 보고서와 다르지 않다면 어떨까. 끝내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실험도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을까.
그렇지 않다. 가설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이론이나 답을 찾아내려고 세운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실험과 같은 검증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옳고 그름을 알게 된다. 답을 모르니 가설을 세우는 것이고, 실험으로 그 가설이 틀렸음을 확인하고 나면 새롭게 가설을 세워 다시 검증에 나서면 될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과학 이론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숱한 ‘틀린 가설들’ 위에 서 있다.
게다가 책상머리에서 만든,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밀어붙였을 때의 어마어마한 예산 낭비를 떠올리면 작은 규모의 정책 실험에 들어갈 비용을 아까워하거나 아낄 일은 아니다. 올해 우리 정부의 일자리 예산은 25조 8000억 원으로 지난해보다 21.3%나 늘었지만, 이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어 집행할 정책들이 정말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의 가설보다 더 단단한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아니 그만큼의 예산을 써도 괜찮을 만큼의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한 걸까. 지난번 기사에서 살펴봤듯이 그저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 쓰던 곳에 그냥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른 이유로 핀란드의 정책 실험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제대로 된 데이터를 얻을 만큼 충분한 기간과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거나,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로) 기본소득의 근본 개념에 맞게 실험 설계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든다. 그러니 정책 실험을 하려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놓쳐선 안 되겠다.
정책 실험은 시민을 ‘값비싼 실패’로부터 보호한다
2003년 영국 국무조정실 산하 연구소가 낸 보고서 <실험하기 – 정책 수립 과정에서의 파일롯의 역할>은 “정책 실험이 각료들과 행정부 그리고 납세자들을 앞으로 닥칠 값비싼 실패(expensive failures)로부터 보호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어떤 정책이 결함이 있고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 실험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더 큰 정치적이고 재정적인 실패를 피하도록 미리 도왔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을 진행한 핀란드 정부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이론적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 구체적 근거(Evidence)에 기반을 둔 정책 수립 과정을 발전시키려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새로운 정책을 전면적으로 도입하기에 앞서 좀 더 작은 규모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해봄으로써 시민이 새로운 정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정책을 만드는 전혀 다른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핀란드의 정책 실험 설계에 참여해온 싱크탱크 데모스 헬싱키(Demos Helsinki)의 미코 안날라(Mikko Annala) 연구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실험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은 실험과 시제품 제작을 거친 뒤에야 확산이 이뤄지는데 정부만이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괴상한 일이다. 그러한 경향이 정치를 증거에 반해 아주 이론적이고 느리고, 또 추측에 기대게 만든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EC)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몇 년 전부터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 행동적 통찰(behavioral insights)을 활용하라고 회원국들에 권고하고 있다. 그 대표적 접근법이 바로 ‘무작위 대조 실험(RCT)’ 방식의 정책 실험이다. 지난해 3월엔 OECD 35개 회원국과 5개 비회원국의 장관들이 모여 ‘공공 부문 혁신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다(우리나라도 행정안전부가 참여했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쥐가 나서지 못하는 이유
서울시는 올해부터 3년간 ‘청년수당’을 받는 청년의 수를 10만 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6개월간 다달이 50만 원씩을 받게 될 청년이 지난해 7000명에서 올해는 3만 명으로 늘어나고, 2021년부터는 다시 3만 500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3년간 들어가는 예산은 모두 3300억 원에 이른다.
서울시는 지난달 23일 계획을 밝히면서, 2019년 청년수당을 받았던 3151명 가운데 47.1%가 ‘자기 일(취업·창업·창작 활동 등)을 찾았다’는 점을 성과로 내세웠다. 그러나 수당을 받지 않은 이들과의 비교가 없어 이를 정책 효과로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서울시는 조만간 대조군과의 비교 결과를 내놓겠다고 했지만 처음부터 정책 실험으로 설계가 되지 않아 뒤늦게 제대로 된 비교가 이뤄질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다(게다가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과 달리 행정 자료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부분도 있어 보인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의 경우 고용률은 행정 자료를 근거로, 삶의 질과 신뢰도는 설문조사를 근거로 분석했다).
사실 정책 확대를 발표하기에 앞서 지난해 1월, 서울연구원과 LAB2050은 서울시에 ‘청년 기본소득’ 정책 실험을 제안한 바 있다. 20대 청년들 2400명을 800명씩 세 개 집단으로 나눠 두 집단엔 조건을 달리해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나머지 한 집단엔 지급하지 않는 것이 기본 구상이었다. 2년간 이 세 집단의 변화를 살피며 정책 효과를 면밀히 검토하고, 효과가 확인되면 지금의 청년수당을 모든 청년에게로 확대하자는 뜻이었다. 2년간 들어가는 예산은 최대 96억 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마치 청년 기본소득을 곧바로 도입하자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지면서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반대 청원이 며칠 새 30건 넘게 올라왔을 정도다. “서울시, 무작위로 청년 1600명에 50만원 수당 검토”(중앙일보, 2019.2.21.)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자 서울시는 ‘제안을 받은 것은 맞지만 구체적 검토는 하지 않았다’며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결국, 2년간 96억 원을 쓰겠다던 정책 실험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바람에 그 33배에 달하는 3300억 원(3년간)이 정책 효과에 대한 과학적 검증 없이 쓰이게 된 셈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그리고 우리는 정말 첫 번째 쥐 없이도 치즈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앞으로 두고 볼 일이지만, 정책 실험이 첫발을 떼려면 아직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웃지 못할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음 기사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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