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대 자본 프레임 수명이 다해가면서 세계는 대안 없는 혼돈의 시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선도했던 미국과 영국은 가장 먼저 세계화 흐름에서 발을 빼고 있다. 유럽연합을 주도해 왔던 독일과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좌파 블록을 형성하며 새로운 실험을 했던 중남미 나라들과 민주화의 봄 릴레이를 달렸던 중동 나라들 모두 혼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미래지향적 흐름을 보여준 것은 한국의 촛불시민혁명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지난한 역사를 거치며 새로운 미래를 잉태한 사건이었다. 세계혁명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 수도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과연 촛불시민혁명 속에 담긴 과거와 미래는 어떤 것인가?
엘리트주의의 파산
한국현대사 저변에서 작동했던 중요한 프레임은 시민주의 대 엘리트주의였다. 시민주의와 엘리트주의 투쟁의 역사였다. 시민주의 핵심 요지는 이렇다. 역사 향배를 좌우하는 순간에 시민들은 무대 한복판에 자발적으로 진출해 국면을 돌파했다. 시민들은 집단 지성을 바탕으로 향후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은 세상을 바꾸는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주체로 성장해 왔다.
시민주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엘리트주의’이다. 엘리트주의는 시민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트 그룹만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보며, 시민은 리더십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는 일찌감치 파산했다. 해방에서 분단,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바로 엘리트주의가 파산하는 과정이었다.
1945년 미‧소‧영 3국 외상이 주도 아래 한반도 문제 처리 방안을 담은 모스크바삼삼결정을 발표했다. 민초들은 강대국이 우리 민족의 문제를 임의로 다루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남로당 중심의 좌익 세력과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세력은 삼상결정에 대한 찬반 입장을 갈려 극심하게 대립했다. 그러는 사이 친일파들은 즉시 독립을 외치며 빠르게 입지를 회복해 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민초들은 친일파를 제압할 절호의 기회로 열광적인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좌익 세력은 이승만 정권 내부 일로 간주하고 방관했다. 약점을 간파한 이승만과 친일파는 반민특위를 파괴한 뒤 여세를 몰아 진보적 정당 사회단체를 강제해산 시켰으며 반정부 인사 12만 명을 처형했다.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로당 중앙은 ‘망국적인 5‧30단독선거를 파탄시켜라’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를 받아들인 민초는 거의 없었다. 민초들은 전세를 뒤집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적극 투표에 참여해 중도 진보 성향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결과는 이승만의 참패로 나타났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승만 실각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민초들은 5‧30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된 뒤 친일파를 제거함과 동시에 남북협상을 추진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 모든 꿈은 한 달도 채 안된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하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국전쟁을 주도한 인물은 엘리트주의 화신이기도 했던 남로당 총책 박헌영이었다. 박헌영은 인민군이 진주하면 남로당 20만 당원을 주축으로 민중봉기가 일어남으로써 승리를 쉽게 확정지을 수 있다며 북한 수뇌부를 설득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끔찍한 희생과 함께 분단을 고착화 장기화시켰을 뿐이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민초들 사이에서는 지도 엘리트들을 쉽게 믿지 않는 잠재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지도 엘리트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시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주의가 태동했다.
시민주의 전성시대
여기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한 존재가 있었다. 그 어떤 뛰어난 지도자나 그룹도 그보다 위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수십만 명 사람들이 (어쩌면 수백만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존재의 지도를 받아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깨달았다. 일상적으로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았고 그 과제 수행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도 알았다. 때로는 죽음도 불사해야할 만큼 고난이 뒤를 따랐으나 기꺼이 이를 감수했다.
그 위대한 존재는 5.18광주시민이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주역이었던 이들 시민만큼 우리 역사에서 강력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지도력을 발휘한 존재는 여간해서 찾아볼 수 없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5.18광주시민의 준엄한 모습 앞에 기꺼이 자신을 복종시키려 했던가?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5.18광주시민이 던진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고 그 실현을 위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시민 리더십의 절정을 보여준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시민 리더십을 내면화한 수많은 활동가들이 민주화대장정의 격랑을 헤쳐 나갔다. 1987년 민주화대장정은 승리의 봉우리에 올라섰다. 이어진 6월민주항쟁은 시민 리더십을 다시 한 번 높은 수준에서 발현되었다. 시민 리더십을 가장 먼저 체화하고 행동을 나선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6월민주항쟁 열기가 채 가시도 전에 7,8,9월 노동자대투쟁이 폭발했다. 그 결과를 짧은 기간 안에 1200여 개 민주노조가 탄생했다. 한 번 폭발한 노동운동 기세는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노동운동은 한국사회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노동, 환경,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사회운동이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6월민주항쟁을 거쳐 시민사회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우리 역사에서 시민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며 활짝 꽃을 피웠던 시절이었다. 이를 입증하는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7,8,9월 노동자대투쟁 모두 시민들이 자발적 판단과 선택, 결심이 만들어낸 역사였다. 전체 과정을 기획하고 이끈 소수 엘리트 집단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활동가들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시민의 자발적 진출을 도왔을 뿐이었다.
둘째, 결정적 순간마다 시민들은 시대의 과제를 담은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높은 리더십을 발휘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던진 메시지는 “두려워 말고 독재에 맞서 싸워라!”였다. 가장 빠르고도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학생운동이었으며 이후 민주화 세력 전체가 이를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6월민주항쟁이 던진 메시지는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라!”였다. 가장 빠르고도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노동자들이었으며 이후 시민사회운동 전체가 그 메시지를 가슴 깊이 품었다.
셋째, 일련의 국면을 거치면서 시민 스스로 보다 높은 단계로 진화해 갔다. 4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시민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5.16군사쿠데타 앞에서 저항을 포기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군부세력에 맞서 저항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는 고립된 채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6월민주항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5.18광주 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지역적 고립을 완전 극복했다. 이로서 한 국면을 넘어선 시민들은 시민사회운동 활성화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능동적 주체로 성장해 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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