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중국은 우리에게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다. 중국 상수를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우리 미래가 상당 정도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는 중국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만 잘 하면 미래를 펼쳐낼 역동적 무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국을 잘 알아야 한다. 중국은 유사한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델의 나라이다. 섣부른 잣대로 접근했다가는 패착을 범하기 십상이다. 중국을 이해하자면 반드시 현대 중국을 태동시킨 중국혁명과 개혁개방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개혁개방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살펴보도록 하고 먼저 중국혁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잠자는 사자가 깨어나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쟁에서 패한 뒤 대서양에 외로이 떠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이 한 일이라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독서를 통해 나폴레옹은 중국이라는 나라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새롭게 이해한 중국은 변방에 위치한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오랫동안 인류 문명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영광스런 나라였다. 나폴레옹은 근대 이후 정체된 중국은 잠시 잠든 사자라고 보았다. 그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세상을 호령할 것이 분명했다.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면서도 발전된 통일국가였다. 폴 케네디는 자신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근대 이전의 문명 가운데 중국 문명만큼 앞서고 자부에 찬 문명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폴 케네디도 지적한 바 있지만 중국의 장기간에 걸친 번영을 뒷받침했던 것은 과학기술 발전이었다. 인류 문명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중요한 발명이 중국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발명품이 유럽에 전달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과학기술 발달은 통신과 운송 수단, 도로 등의 발달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 진나라 이후 중앙집권적인 관료 제도가 중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봉건 지배층이 토지에 일차적인 이해를 두고 있는 조건에서 관료제도 발전은 상공업 발전의 강력한 질곡으로 작용하였다는 데 있었다. 봉건 지배층은 지나친 상공업 발전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이탈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은 18세기부터 정체되기 시작했으며 1800년을 기점으로 문명의 중심축은 유럽 세계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후 유럽과 중국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라는 상반된 운명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유럽 열강의 간섭과 침탈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멸망했다. 각 성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군벌들은 봉건 지주와 결탁해 민중을 극렬하게 수탈하였다. 왕조 말기마다 최고조에 달했던 전형적인 이중 수탈이 20세기 초반에 그 마지막 발악을 다하는듯한 양상이었다.

유럽 열강 침탈과 봉건 지배 세력의 야수와도 같은 수탈은 중국 민중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을 지폈다. 잠자는 사자 중국은 바로 그러한 민중의 분노에 자극받아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의 약진

1921년 12명이 참가한 가운데 중국공산당 ‘1차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비록 출발은 미약했으나 중국공산당은 노동조합을 조직함으로써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22년 쑨원(孫文)으로부터 국공합작 제의가 들어왔다, 군벌과 손을 잡고 이권 쟁탈에만 열을 올리는 자본주의 열강에 환멸을 느낀 쑨원이 “소련의 조직 기술과 훈련 방법을 배우는 것만이 혁명 승리의 유일한 길이다.” 라는 판단을 내리고 소련 원조를 받아들이면서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제의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쑨원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차 국공합작이 성사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독자적인 당 대열을 유지한 상태에서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과 국민당 정부에 함께 참여하였다. 덕분에 중국 공산당은 적어도 국민당이 지배하는 영역 안에서만큼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합법적 활동을 통해 비약적으로 힘을 키워 나갔다. 대륙을 뒤흔들 거인이 탄생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노동운동 발전에 힘입어 1927년 초 5만 8000명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24년 당원 수가 불과 500명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성장이었다. 공산당 세력의 급격한 성장은 쑨원 사후 국민당을 이끌고 있던 쟝제스(蔣介石) 일파를 긴장시켰다. 결국 쟝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난징과 상하이 일대에서 노동자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공산당원은 모두 국민당에서 축출되었다.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산당은 당원의 5분의 4를 잃어야 했다. 4·12쿠데타와 함께 쟝제스의 국민당은 지주와 대자본가 계급의 편에 서면서 제국주의 열강과 손을 잡았다. 군벌 토벌에 나섰던 국민당은 가장 강력한 군벌로 변질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전략 노선도 러시아혁명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국민당 공격에 맞서 도시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무장봉기를 단행했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무장봉기는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도시는 국민당 아성이었던데 반해 노동자 역량은 매우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서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이단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름은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련의 동향을 지켜보면서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이 중국혁명의 주력이 될 수 있음을 간파했다. 마오쩌둥은 농민 조직화에 모든 힘을 쏟았다. 마오쩌둥은 농민들과 함께 추수봉기를 단행했으나 국민당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탄압을 피해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정강산을 근거지로 게릴라전 형태의 무장투쟁이 시작되었다.

근거지가 마련되자 각지에서 지원병이 찾아들면서 무장세력 규모가 나날이 커졌다. 마오쩌둥은 무장세력 힘을 이용해 인근 후난성 변방 지역을 해방구로 만든 뒤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소비에트 안에서는 농민의 오랜 염원인 토지 분배가 이우러지고 무상교육이 실시되는 등 혁명적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실험은 민중의 혁명적 열기를 고취시키면서 소비에트가 장시성 일원으로 확산되도록 자극했다.

마오쩌둥 행보는 당내 갈등을 유발시켰다. 농민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무장투쟁과 해방구 전략은 소련 모델을 추종하던 당 지도부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결국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당 정치국에서 해임하고 모든 관계를 끊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당 지도권은 마오쩌둥으로 넘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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