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시민혁명의 대표적 사례로서 의회민주주의의 서막을 연 영국의 명예혁명, 영국으로부터 독립과 함께 근대 공화정을 확립했던 미국혁명 그리고 이번에 다룰 프랑스대혁명을 꼽을 수 있다.

일련의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근대적인 민주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까지는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많은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다. 민주주의 선두 주자로 나선 영국조차도 19세기 초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재산이 많은 10여 만 명에 불과했다. 근대 공화정의 모범을 보였던 미국조차도 19세기 후반까지 백인 남성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유색 인종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여성은 재산 일부로 간주되었다.

여기에 맞서 모든 성인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보통선거 제도 도입을 위한 투쟁이 일어났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노동자 계급이었으며 여성과 유색 인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결국 1928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21세 이상 모든 남녀가 선거권을 갖는 보통선거제가 도입될 수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이러한 시민혁명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함해 근대 이후에 진행된 다양한 혁명의 원형을 잉태했다. 한마디로 근대혁명의 빅뱅이었다.

 

거대한 에너지의 축적

왜 하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폭발한 것일까? 역사상 커다란 사건들이 그러하듯이 프랑스대혁명 또한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거대한 에너지가 일련의 계기를 맞이해 대폭발을 일으킨 결과였다.

16~18세기에 이르는 시기 프랑스는 여러 모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였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축에 속했으며,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과학기술과 교육·문화 등에서 단연 선진국에 속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빠르게 성장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은 지배 권력을 쥐고 있던 봉건 귀족 세력과 격렬한 충돌을 야기했다. 두 계급의 충돌은 종교 대립으로 표현되었다. 봉건 귀족 세력은 상업 이윤 추구를 엄격히 제한하는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었다. 반면 부르주아 계급 대부분은 상업 이윤을 허용한 신교에 속해 있었다. 당시 이들 프랑스 신교도들은 위그노로 불렸는데 종교 개혁가 칼뱅의 교리를 따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가톨릭교회가 상업 이윤 추구를 억제했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생전의 예수는 상업 행위에 대해 깊은 경멸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예수가 살던 로마 시대는 상업과 무역이 크게 번성했으나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던 가장 중요한 ‘상품’은 노예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다. 예수가 상업 행위를 배격하고 만민 평등에 입각한 공동체를 옹호했던 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강력한 저항 논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회 역사가 오래 지속되면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봉건 귀족 세력들의 이해관계는 주로 토지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농노들이 토지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일해 주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중세 말기 도시 상공업이 번성하면서 농노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주어졌다. 도시 삶을 쫒는 농노들의 이탈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봉건 귀족 세력은 상공업 발전을 자신들 존재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일환으로 상업적 이윤 추구를 극도로 억제하였다. 예수에서 비롯된 저항 논리가 후대 귀족들에 의해 지배 논리로 변질된 것이다.

프랑스 봉건 귀족은 상업 이윤 추구를 억제하는 것을 넘어 위그노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1572년에는 8월 24일부터 시작해 10월까지 위그노를 대량 학살한 이른바 ‘성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가톨릭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37년간에 걸친 종교전쟁이 진행되었다.

두 종교 세력이 화해를 모색하는 과정도 있었으나 17세기 후반에 등극한 루이 14세는 종교 자유를 허락했던 낭트 칙령마저 폐기하고 위그노를 재차 학살하기 시작했다. 위그노들은 살기 위해 대대적인 국외 탈출을 감행했다. 루이 14세 제위 기간 중 100만 명이 넘는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다. 이들은 영국, 네덜란드, 독일, 스위스 등으로 이주하여 해당 나라의 산업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는 유달리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힘과 위에서 누르는 힘이 매우 강력하게 충돌을 일으킨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거대한 혁명 에너지가 축적되어 갔다. 프랑스 사회가 불꽃만 틔면 대폭발을 일으킬 거대한 화약고로 돌변한 것이다.

 

대폭발

프랑스 봉건 지배 세력은 부르주아 계급을 억누르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부분적으로는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통치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막강한 재력을 지닌 부르주아 계급의 지원이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봉건 지배 세력과 결탁한 부르주아 세력은 권력을 이용해 쉽게 돈을 벌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18세기 유럽 최대 금융 사건인 ‘미시시피 버블’이 발생했다.

1717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미시시피 사는 북미 대륙 미시시피 강 하류 연안을 식민지로 개척했다. 미시시피 사 사장 존 로는 루이 15세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고 덕분에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와 정부 재정 총괄 책임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존 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북미 식민지 사업 관련 주식을 발행한 뒤 사업 전망을 과대 포장하는 소문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속았다. 처음 50리브르였던 주식 가격은 1719년 12월 초 1만 리브르를 호가했다.

주식 가격은 정점을 찍은 뒤 버블 붕괴로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렸다. 존 로는 주식 가격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 자금을 대거 투입해 주식을 매수했다. 존 로는 자금이 부족해지자 돈을 더 찍어내도록 인가했다. 프랑스 재정 시스템 전체 거품 속으로 빨려들면서 부실화되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미시시피 사 주식은 완전 붕괴해 한 푼어치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전락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자살이 속출했다.

미미시피 버블 사건으로 프랑스 재정은 완전 부실해졌고 신용 또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불신 또한 극에 이르렀다. 프랑스 정부는 융자를 받기도 쉽지 않았고 어렵사리 받더라도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빚을 갚기 위해 고율의 빚을 끌어오면서 빚은 갈수록 늘어 갔다. 루이 16세기 즉위한 이후인 1780년대 이르러 정부 재정은 파산을 향해 치달았다. 재정 절반 정도가 대출금 이자 지불로 탕진되고 있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마지막 선택을 했다.

프랑스는 사제, 귀족, 제3신분(부르주아를 포함한 평민) 등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서 삼부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부회는 지난 150년 동안 소집되지 않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 해법을 마련하고자 삼부회를 소집했다. 공론 장이 마련되자 수백 년 동안 쌓여 온 불만들이 일거에 폭발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제3신분 대표들은 삼부회를 무시하고 별도 대표 기관인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루이 16세가 군대를 동원해 반격을 가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은 즉각 행동에 돌입했다. 무장 필요성을 느낀 시민들은 화약이 저장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파리 시민들은 봉건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대혁명이 본격 막을 올린 것이다. 혁명의 불길은 일거에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먼저 기존 체제 아래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대중의 불만이 고조돼 있어야 한다. 더불어 기존 지배 질서가 더 이상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전자 경우는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수백 년 동안 축적되어 왔었다. 후자를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 계기는 미시시피 버블 사건이었다. 그 사건으로 프랑스 지배 질서는 재정 파탄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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