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그리스 신화 중에 시지프스 이야기가 있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는 벌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 위까지 밀어 올려야만 했다. 바위는 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시지프스는 그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시지프스 신화는 사람들에게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의 굴레가 존재함을 암시한다. 실제로 그런 굴레는 다양하게 존재해 왔다. 한 예로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해 온 ‘성장’을 들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에서 성장 문제는 종종 치열한 시비꺼리가 되어 왔다. 과거 산업화 시절 성장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 가치로 간주되었다. 성장을 위해 재벌 체제도 용인되었고 분배도 최대한 억제되었다. 그러다 보니 민주화 세력 사이에서는 성장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정서적 거부감이 자리 잡았다.
생태계 보전이 중요 의제로 부상하면서 성장을 절대시하는 관점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성장 지상주의가 생태계 파괴를 야기하면서 종국에는 인류 생존마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부 급진적 입장에서는 성장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대해 명확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장을 멈추고 평등 분배·소비 억제·생태 친화적 삶을 추구하는 것만이 인류가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제로(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전제로 평등 분배만을 추구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본질적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자들마다 생각이 서로 다를 것이다. 그 중 하나로서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성장’을 꼽고 있다. 대부분의 논자들이 동의하지만 근대 이전 1인당 생산 증가폭은 거의 제로 상태에 가까웠다. 총량이 증가했더라도 인구 팽창과 경작지 확대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던 것이 근대 이후로 넘어오면서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단적으로 1500년 경 1인당 연간 생산량은 550달러 수준이었으나 오늘날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연평균 8,800 달러어치를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초래했을까? 수많은 요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부의 축적 방식에서의 차이’를 들 수 있다.
근대 이전 추가적인 부의 창출이 없는 제로 성장 상태에서 더 많은 부의 축적은 다른 사람 몫의 강탈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발 하라리 지적대로 수많은 문화권에서 부의 축적을 죄악으로 간주했던 이유였다. 예수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 부자들은 축적된 부를 사치와 허영으로 모두 소비했다. 그들에게 생산적 재투자라는 개념은 머릿속에 아예 있지도 않았다. 지주가 토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자신의 부를 재투자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근대 이후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이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부를 강탈하기도 했지만 주로 추가적인 부의 창출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했다. 크기가 일정한 파이 중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보다 파이 자체를 키우는데 주력한 것이다. 더불어 축적된 자본을 소비하기보다는 더 많은 이윤 획득을 목표로 확대재생산의 증폭제로 재투자했다. 재투자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몸집을 키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자본의 본성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추가적인 부의 창출이 끝없이 확대되면서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성장은 단순한 양적 지표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시장 경쟁은 보다 적은 비용으로 보다 좋은 품질의 상품을 생산하도록 압박했다. 성장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질적 변화를 포함했다.
성장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분리할 수 없는 요소였다. 다만 성장을 둘러싸고 두 가지 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적정 성장률이 낮아져 왔다. 오늘날 선진국의 적정 성장률은 1퍼센트대로 떨어지고 있다. 한국도 적정 성장률을 3퍼센트 정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 그래도 파이의 절대 크기가 커졌기 때문에 성장의 의미를 살리는데 지장이 없다. 이와 함께 인간의 창조력이 가치 창출의 주요 원천으로 떠오르면서 성장의 내용이 물질적 생산에서 비물질적 생산으로 바꾸어가고 있다. 성장은 곧 환경 파괴라는 등식에서도 어느 정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장 동력도 물적 자본 투하에서 사람의 창의적 능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앞서 제기했던 대로 대한민국이 제로 성장을 전제로 평등 분배에만 집중한다면 어떤 결과를 빚을까? 부의 축적 가능성이 제거된 조건에서 어느 누구도 추가적인 부의 창출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아무도 원치 않았던 국민경제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가 똑 같이 보조를 맞춘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성장의 포기는 곧 붕괴인 것이다.
그동안 성장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굴레와도 같았다. 인간들은 성장률이 떨어지면 이를 끌어올리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게 해서 오른 성장률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인간들은 또 다시 이를 끌어올리고자 안간힘 쓰는 과정을 반복했다. 성장은 영락없는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우리는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무분별한 환경 파괴를 용인하면서 성장만을 절대시하는 입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더불어 성장 자체를 포기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장 없이 존속할 수 없는 세상 한 복판에 던져져 있다. 제로 성장을 실현하자면 인류 전체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야 한다. 인류는 아직 그러한 체제를 발명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의 한계이다.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그 한계부터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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