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4.13총선을 앞둔 야권 지지자들의 얼굴은 매우 어두운 편이었다.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온 4.13총선 예측은 예외 없이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적어도 180석 이상을 새누리당이 쓸어가거나 개헌 가능선인 200석을 넘길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왔다. 실제 결과는 모두의 예측을 뛰어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은 텃밭인 호남에서 전멸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에서의 압승으로 제1당 위치에 올랐다. 거꾸로 압승을 예상했던 새누리당은 참패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여기까지가 모두가 알고 있는 4.13총선 전후의 일들이다. 여기서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 보자. 과연 4.13총선은 누가 기획한 결과인가. 4.13총선을 이렇게 되도록 기획한 정치 지도자는 없다. 정치 그룹도 없다. 그 어떤 정치 엘리트도 4.13총선을 제대로 기획한 적이 없다. 귀신 곡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굳이 답을 찾자면 하나의 가능성 밖에 없다. ‘집단 지성에 기초한 대중의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대중의 선택이 엘리트의 판단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확인해 준다. 해방 국면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엘리트 집단이 대중의 판단과 어긋나는 길을 갈 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입증한다.
해방 국면 당시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치달을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가 하나 있었다. 바로 좌익 세력과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세력이 연합해 친일파를 제압할 수 있는가 여부였다. 친일파만 제압할 수 있었다면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던 미국과 이승만은 힘을 쓸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이 연합해 친일파를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모두 세 차례 정도 있었다.
첫 번째 기회는 1945년 말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계기로 마련되었다. 모스크바 삼상결정은 한반도 분단 극복을 위해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미·소·영·중 4개국이 이를 후견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회의였다. 임시정부 세력은 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좌익 세력은 찬성하는 것으로 입장이 확연히 갈리면서 극단적인 대립을 보였다. 그 와중에서 친일파는 즉시 독립을 외치며 입지를 확대했다.
당시 대중의 정서 밑바닥에는 우리 민족의 문제를 강대국이 임의로 결정한 것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작동하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여 한국 문제는 한국인에게 맡기고 미·소 양군은 즉시 물러갈 것을 요구했다면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좌익과 임시정부 세력의 연합이 가능했을 것이며 폭넓은 대중의 지지와 동참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면 친일파는 입지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 친일파가 미군 철수 요구에 동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대중은 ‘반민특위’ 활동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지리멸렬해 있던 임시정부 세력과 좌익 세력은 ‘반민특위’를 뒷받침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약점을 간파하고 반민특위를 해체시켰을 뿐만 아니라 좌익과 임시정부 세력 관련 단체와 정당을 강제 해산시키는 등 강력한 공세를 취했다.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대중은 이를 이승만 정권을 심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5.30총선에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중은 진보적 정당, 단체가 강제 해산된 조건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진보 중도 인사에게 적극 투표하였다. 그럼으로써 전체 의석의 60퍼센트에 이르는 126석을 무소속으로 당선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좌익세력을 이끌고 있던 남로당 중앙은 대중의 선택과는 정반대 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내린 방침은 “망국적인 5.30단독선거를 파탄시켜라!”였다. 하지만 남로당 방침을 따른 경우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해방 이후 좌익 엘리트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대중의 판단과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좌익 세력은 대중과 유리되면서 헤어날 수 없는 고립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댔던 것은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였다. 하지만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는 남한 좌익 세력의 전멸로 이어졌을 뿐이다. 5.30총선 결과로 빚어진 절호의 기회 역시 한국전쟁의 광풍 속에서 허망하게 날아갔다.
한국전쟁 이후 대중의 선택은 이전 시기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 주었다. 대중은 중요한 순간 자신들의 판단과 선택으로 역사의 새 국면을 열어 나갔다. 한국현대사를 아로새긴 민주화 대장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민주화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5.18민주화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엘리트 그룹이 존재했었는가. 5.18민주화운동은 전적으로 광주 시민이라 불린 대중이 만들어낸 드라마였다. 민주화운동을 승리로 장식한 1987년 6월민주항쟁은 어떠했는가. 당시 항쟁지도부였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하루 투쟁을 기획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 항쟁은 한 달간 지속되었다. 이 전체를 기획한 엘리트 그룹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 역시 대중의 자발성이 만들어낸 드라마였다.
6월민주항쟁 바로 뒤이어 터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한층 극적이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거치며 전두환 정권 탄압으로 다수의 민주노조가 무참히 파괴되었다. 사태를 지켜본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은 앞으로 상당한 기간 합법적 노조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안으로 서울노동자연합 등을 결성했다. 하지만 대중은 불과 얼마 후 7,8,9월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일거에 1200여 개의 민주노조를 만들어냈다. 7,8,9월노동자대투쟁 자체를 기획한 엘리트 그룹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대중의 집단지성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 4.13총선 결과는 그러한 진화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입증한다. 오늘날 정치 세계에서 대중은 능동적 주체가 되어 리더를 호명하고 동행할 것을 요구하는 수준까지 왔다. 리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빠의 정치’는 과거가 남긴 퇴적물일 뿐이다. 대세는 이미 자기편이라며 대중은 알아서 따라 올 것이라 믿는다면 이 보다 위험천만한 자가당착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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