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연은 2008년부터 매 년 진보 정책 연구소 최초로 <전망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경제, 주거, 노동, 복지 분야를 중심으로 세계의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사회로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016년 전망 보고서 역시 총 8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며
지난 20년간 한국의 농업정책은 큰 틀에서 보자면 변화가 없었다. 대외적으로는 농산물 시장개방을 확대하는 정책이 일종의 상수처럼 작용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시장개방의 확대에 편승하여 농업을 구조조정 하는 정책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정책의 골격은 김영삼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세부 내용에서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농정의 기조를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 개방농정’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농업과 농민에 미치는 영향력의 작동방식을 보면 구조조정 보다는 시장개방이 더 우선순위의 규정력을 갖고 있다. 즉, 우선적으로는 시장개방의 확대에 따라 농업과 농민에 미치는 환경의 변화가 발생하며, 구조조정은 이와 같은 대외적 환경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대내적 농업정책인 것이다. 초국적 자본과 국내 재벌·대기업 그리고 정부(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점이 시장개방이며, 이것이 지금까지 농업을 포함한 경제정책의 일관된 상수로 작용했다. 그리고 농업의 구조조정은 정부에 의해 선택받은 소수의 정예 농가를 대상으로 경쟁력과 규모화 및 시설집약화를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의 중소규모 가족농은 퇴출의 대상이 되어 몰락의 길로 강제로 유도되었다. 다만 몰락의 속도를 조절하는 차원에서 직접지불제도, 제한적인 가격안정 정책, 각종 농가부담 경감 대책 등이 연착륙의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쌀시장을 관세화로 전면 개방함으로써 쌀도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유일하게 수입자유화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쌀마저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농산물 시장은 100%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2015년에는 중국, 호주, 캐나다 등 농산물수출 강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잇따라 발효되거나 비준됨으로써 시장개방의 폭과 속도가 훨씬 더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신규 가입을 사실상 내부적으로 결정한 상태에 있고, 조만간 공식 선언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명박 정부 이후 박근혜정부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농업 구조조정을 통한 집중 지원의 대상을 소수의 개별 전업농가로부터 점차 더욱 규모화된 극소수의 기업농으로 옮겨가면서, 수출농업과 ICT 융복합 스마트팜, 자본집약적인 시설농업으로 정책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식량자급률, 농가소득보전, 농산물가격안정 등과 같이 농업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할 영역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약화되고 있다.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정책하에서 농업·농촌·농민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이론적으로 이미 현실에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농업과 농민의 지속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글은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농업과 먹거리, 지속 불가능한 현실
농업과 농민의 지속가능성을 찾기 위한 첫 걸음은 역설적이지만 현재의 농업과 먹거리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 년에 걸친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의 결과는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나듯이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의 급격한 몰락이다. 1990년대 초반 약 7백만 명이 넘던 농가인구가 최근 약 2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얘기하듯이 경제성장에 따른 농가인구의 감소효과를 고려하더라도 20년 사이에 농가인구의 60%가 줄어드는 급격한 몰락은 다른 나라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연착륙을 위한 보완대책이 다소 강화되면서 몰락의 속도가 조금 늦추어졌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후 다시금 그 몰락의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농가인구의 양적인 몰락과 더불어 60대 이상 농민이 전체 농민의 약 절반 가까이 되는 농가의 노령화는 농업노동력의 질적인 붕괴마저도 초래하고 있다. 최근 농업노동력에서 이주 노동자 및 이주 여성농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약 20% 정도까지 빠르게 늘어난 현상은 농업노동력의 양적·질적 붕괴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은 경제성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시장개방 및 구조조정을 강압적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이 초래한 인위적인 참사로 보아야 한다. 특히 수입 농산물에 대응하여 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소수 정예농가 육성에 자원과 예산 및 제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농업정책에서 소외된 대다수의 중소 가족농은 빠르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도시 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는 농촌의 빈곤화 및 양극화는 그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다. 농민층 가운데 절대빈곤층에 해당하는 빈곤농가의 비율이 약 24% 수준으로 도시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다. 도시근로자가구의 상위 20% 소득이 하위 20% 소득에 비해 약 5배 정도 높은데 비해, 농가소득은 상위 20% 소득이 하위 20% 소득에 비해 약 11배 정도 더 높을 만큼 양극화의 진전도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소수의 전업농과 기업농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위 농민층 가운데 억대 농부로 대표되는 부자 농민들도 약간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은 대다수 농가의 퇴출 및 빈곤화라는 희생위에 얻어진 성과에 불과하다. 게다가 정부의 지원으로 성장한 전업농 및 기업농이라 할지라도 수입 농산물에 대응하여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춘 농가는 극소수에 불과할 정도이다. 그나마 이와 같은 극소수의 농가들이 갖는 경쟁력이란 것도 한편으로는 이주 노동자에 의한 저임금과 일반화되지 않은 틈새시장에서의 한시적인 비교우위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력의 토대 자체가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시장개방 및 구조조정에 따른 농업과 농민의 급격한 몰락은 당연하게도 식량자급률의 급속한 하락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초반 약 45% 수준이었던 식량자급률이 최근 약 22∼23% 수준으로 반 토막이 났다. 정부가 아무리 식량자급률을 높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라도 시장개방 및 구조조정의 농업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는 한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듯이 식량자급률은 지속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식량자급률의 하락은 또한 우리 밥상에서 소위 ‘글로벌푸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글로벌푸드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에 비례하여 밥상의 먹거리에 대한 불안과 위험도 높아졌다. 유전자조작농산물(GMO), 대규모 화학농업과 공장식 축산, 장기간·장거리 유통에 따른 수확후처리에 투입되는 다양한 종류의 화학적 처리기술, 패스트푸드 및 인스턴트 식품에 투입되는 각종의 합성화학 첨가물 등은 먹거리 위험을 초래하는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는 글로벌푸드이기 때문이다. 글로벌푸드의 확대가 먹거리의 위험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식품안전에 대한 규제 장치만으로 먹거리 안전을 보장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식품안전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수록, 까다로운 안전 기준에 적합할수록 해당 먹거리의 가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친환경농산물을 비롯한 안전한 먹거리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되는 현실은 이와 같은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득수준에 따라 먹는 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먹거리 양극화 현상이 확대되고, 이는 건강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가난한 계층일수록 아토피, 비만, 당뇨, 고혈압 등과 같은 식원성(食原性) 질병이 높게 나타난다는 국내외 수많은 보고서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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