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지난 주말, 한 도시인문학 계열의 학회에서 주최한 ‘글로벌 도시화와 도시공동체’라는 학술대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최근 마을에서도 ‘마을이란 무엇이고 공동체는 무엇일까?’라는 논의가 뜨거운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였다. 오전과 오후에 걸쳐 9개 주제의 발표를 들으면서 느꼈던 첫 느낌은 ‘의외로 공동체에 관심이 많네?’였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회장을 찾았다는 것은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학계의 관심과 현장의 당면과제 사이에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루어진 내용들을 살펴보면 ‘서구 시민사회 형성과정에서 공동체론에 대한 철학적 의미고찰,’ ‘협동의 도시 볼로냐가 전하는 메시지,’ ‘지속가능한 도시공동체의 조건,’ ‘중세 도시공동체의 이상과 현실,’ ‘18세기 중엽 에든버러와 문필공화국,’ ‘프랑스 노동자 조합운동과 도시공동체,’ ‘비즈니스 모델로서 지역의 가능성,’ ‘비혼청년층의 주거공동체 사례와 친밀성 재구성,’ ‘주택협동조합의 운영구조 및 공동체 기반 활성화 방안’ 등이었다. 지극히 철학적인 주제에서 실용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를 다루기는 하였으나 주요 주제들과 그에 대한 토론이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머문 감이 있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마을 현장은 치열한 전쟁터인데 학자들은 노변정담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이 간혹 들기도 하였다.
물론 선대에 범한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옳은 곳인지, 그 곳으로 바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인지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 생각을 하는 존재의 숙명이자 의무일 것이다. 이런 사고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므로 지난 주말의 학술대회와 같은 것이 보다 다양한 곳에서 더 자주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칫 학문이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현학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학자 스스로 마을과 공동체의 현실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학술대회에 참석하였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이 주제들은 당연히 현장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씀할 것이라 여겨진다. 학자의 현장에 대한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마을, 공동체, 그리고 주민들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고 기존의 이론으로 그 복잡다단함을 해석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을공동체의 일원이자 당사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그에 따른 경험과 활동을 학문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입장에서 전자의 방식은 이 사회의 진보에 유용하지 않다고 여기는 편이다. 가끔 교수들이나 공공연구기관의 박사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학문이 현장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을 접하게 된다. 그럴 때면 주민이 낸 세금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연명하는 학자들이 이래도 되는가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학문에서 다루는 이론이라는 것은, 특히 사회를 다루는 경우에는, 이미 발생한 현상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항상 실제 사회보다 뒤쳐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현장이 이론보다 빠르고, 옳다!’는 것을 인식해야 사회학이나 인문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장면 #2.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동네단위 마을계획’이라는 것이 2014년 2개 마을, 2015년 5개 마을에서 시범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우연히 2014년 시범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일개 학자가 마을, 마을공동체, 그리고 주민에 대한 어떤 이해가 있었겠는가. 당시에 주민의 입장을 대변한답시고 “마을계획이란 것은 주민들의 일상적 사고와 활동의 순환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일상적이란 것이다. 흔히 전문적인(professional) 것이 비전문적인(amateur) 것에 비해 내용의 깊이가 있고 훌륭하다고 인식되지만 두 단어는 해당분야로 돈을 버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일 뿐이다. 전문적인 결과물이 적절하고 효율적이고 효과적이고 옳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비전문가주의(amateurism)는 미숙함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인식되어야 한다. 여기에 마을계획의 활성화 여부가 달려있다.”라는 얘기를 하였다. 이를 듣고 있던 주민들의 “왜 사고가 필요한가? 생각이 없으면 마을살이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냥 (마을계획은) 삶이라고 해야 되지 않나?”라는 지적에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저 당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주눅 들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드러내고 서로 논의하고 모아보자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측면에서는 전혀 엉뚱한 얘기를 한 셈이다. 주민을 앞에 두고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인데, 아마도 학자나 전문가, 공무원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학자와 전문가는 여론을 형성하고 공무원들은 물질적 지원을 결정하지만, 그렇기에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려 노력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당사자인 우리들, 주민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주눅이 든다거나,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지레짐작하고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 주민 주도로 마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공공성과 대표성에 대한 부담이었다. ‘마을계획인데 우리가 마을을 대표할 수 있을까? 마을계획이라면 공공성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인해 오히려 자유로운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스스로의 계획 활동이 위축되는 경우가 있었다.
계획이라는 단어는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면이 있는데,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과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방학이면 어김없이 작성하던 이상적인 생활계획표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으로 계획의 수립에 임하게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계획이론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계획이라는 것은 사회 각 부문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인식이 강하였다. 이런 기조에 따라 수립되는 것을 ‘종합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가나 행정가들이 사회 모든 분야를 아울러 종합할 정도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최근의 계획은 필요한 부분에 대해 필요한 것을 다루되 수시로 검토하고 수정해나가는 것이라는 기조로 바뀌었다.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대표성이 계획에서 필수적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얼마나 문제해결에 ‘적합’한 것인가가 중요하다. 공공이 수많은 재원을 투자하는 계획 활동도 이럴진대 동네 단위에서 이뤄지는 주민에 의한 계획 활동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후기.
아이젠하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투를 하다보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더라. 두꺼운 작전계획서는 실제 상황에서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았다면 단 하나의 전투에서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계획의 속성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계획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계획안이나 보고서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라는 것이다. 전투를 치루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고 어떤 지휘관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어떤 특기를 발휘하는지, 어떤 부대가 어느 위치에 있고 언제 즈음 목표 지점으로 갈 수 있는지, 전체 부대를 먹이려면 식량은 얼마나 필요하고, 적의 진지를 포위하여 묶어두려면 탄약과 포탄은 얼마나 필요한지 등을 미리 검토하여 파악하고 아군의 대응에 따라 적군이 어찌 반응할 것인지 등을 미리 검토하는 것이 핵심이지 작전계획서의 시나리오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는지는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서로 잘 모르던 사람들이 교류를 하게 되고, 서로의 희망을 나누고, 서로의 자원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각자가 새로운 수많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만 하고 접을 일도 아니며 단기간에 끝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끈기를 가지고 장기적인 지원을 해야 하는 일이며 주민에게 가능한 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는 일이다.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마을계획의 공공성은 주민들이 자유롭게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는 틀이 갖춰졌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당연히 대표성을 강조하는 것은 독이 될 것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지 대표자를 꿈꿔서는 올바른 거버넌스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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