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민수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에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 여호와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 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하여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경에 따르면 이 때 집계된 장정이 총 603,550명이었다고 한다. 민수기(Numbers)라는 명칭은 이처럼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인구의 수효를 파악하고 기록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고, 사실 중 가장 기본은 수량이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발굴된 점토판에 적혀있는 설형문자가 가축과 재물의 수효를 기록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는 익히 알려져 있다. 최소한 기원전 1,6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에서 인구와 재물 등의 조사가 폭넓게 이루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이집트 고왕조시대(기원전 32~22세기)에 이미 전국의 인구를 조사하여 기록했다고 추정된다. 심지어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잉카인들도 라마나 알파카의 털을 꼬아서 만드는 퀴푸스(quipus)를 활용하여 인구, 가축, 재물 등의 수량을 10진법에 따라 기록하였다.

기원전 6세기경 로마의 툴리우스(Servius Tullius)는 전국의 인구를 조사하여 무장 가능한 시민 8만 명을 가려내었다. 이를 시초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 5년마다 전국의 전체 인구를 조사하여 시민과 그들의 재산을 등록하였으며 이 자료를 세금을 징수하고 군인을 징집하기 위한 기초로 활용하였는데 이를 첸수스(census)라고 하였다. 인구총조사를 뜻하는 센서스라는 단어는 이에 기원한다.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기록을 쌓아 온 중국의 경우 이미 한나라 시대(기원전 206년~서기 220년)에 이르면 정밀하고 대대적인 인구조사가 시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앞서 민수기의 내용이나 그리스 및 로마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구조사의 중요 목적 중 하나는 징병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이전 춘추전국시대에는 각 국이 서로 패권과 생존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시기였기에 인구조사가 부국강병을 위한 치세의 기본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많은 기록이 멸실되어 고대의 상황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역설적으로 일본의 동대사에 소장되어 소실을 면한 신라장적을 살펴보면 최소한 통일신라시대(7~9세기)에는 매우 정교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가로 58cm, 세로 30cm 정도의 한지 2매에 해서체로 기록된 이 문서가 어떤 경위로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경론질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신라의 서원경(현 청주시) 인근 네 개 촌락의 행정기록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네 개 마을 중 하나인 사해점촌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이 고을 사해점촌을 조사하니, 마을 크기가 5,725보이다. 호구는 합하여 11호가 된다. 마을의 모든 사람의 숫자를 합하면 147명이고, 그 가운데 전부터 계속 살아온 사람과 3년 사이에 태어난 자를 합하면 145명이 된다. 정이 29명(노비 1명 포함), 조자가 7명(노비 1명 포함), 추자가 12명, 소자가 10명, 3년간 태어난 소자가 5인, 제공은 1명이다. 여자의 경우 정녀 42명(노비 5명 포함), 조녀자 9인, 소녀자 8인, 3년간 태어난 소녀자 8명(노비 1명 포함), 제모 2명, 노모 1명이다. 3년간 다른 마을에서 이사 온 사람은 2명이다. 가축으로는 말이 25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22마리, 3년 사이에 보충된 말이 3마리이다. 소는 22마리가 있고 그 가운데 전부터 있던 것이 17마리, 3년 동안 늘어난 소는 5마리이다. 논은 102결 2부 4속이며 관모전이 4결, 내시령답이 4결, 연수유답이 94결 2부 4속이며 이 가운데 촌주가 그 직위로써 받은 논 19결 70부가 포함되어 있다. 밭은 62결 10부 5속이 있다. 뽕나무는 모두 1,004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90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914그루이다. 잣나무는 모두 120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4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86그루이다. 호두나무는 모두 112그루였으며, 3년간 심은 것이 38그루 그 전부터 있던 것이 74그루이다. …”

위 내용의 기록방식을 요약하자면 마을의 이름, 마을의 크기, 호구 수, 인구수 및 변동, 가축 수 및 변동, 토지, 수목 수 및 변동 등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3년 간~’이라는 표현이 많은 것을 보아 최소한 3년에 한 번씩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처럼 단순히 수량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양의 변동과 원인까지 파악하는 정성을 들였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인구조사가 행정의 근본을 이루는 중요 사항이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징병과 조세의 근거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하다.

과거에도 중요한 자료였던 인구자료는 현대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초자료이다. 사회의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모하였기 때문에 조사하여 기록해야 할 사항들도 단순히 장정이나 재물의 수효를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통계법 제5조의3에는 전국을 대상으로 인구, 주택, 사업체 등에 관하여 총조사(전수조사)를 실시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10월 22일부터 11월 15일까지 진행되는 인구주택총조사는 이에 근거하여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인구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쥐고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임금이 천자로 행세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만백성의 사정을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자료와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들에게 주권이 주어짐에 따라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기초적인 인구통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료들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인구 등의 전수자료나 소득과 같은 민감한 자료의 경우에는 공개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설명이 있으나 일반인이 통계자료만 보고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니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이 뭉쳐져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를 만들고 학문을 이룬다. 이것이 국력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21세기의 센서스자료가 일반대중에게도 폭넓게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구주택총조사가 모든 사람들의 협력을 통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향후 일반 모두에게 유용한 자료로 제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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