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상황 하나. 어떤 과격한 단체의 회원들이 모여 이웃 나라 정치인들의 망언을 규탄하며 국기를 불태우는 화형식을 진행한다. 단체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퍼포먼스가 이웃 나라를 정말 망하게 하거나 적어도 정치인의 망언을 사라지게 하리라는 믿음에서 화형식을 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단체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화형식으로 인해 규탄하는 대상의 행위가 실제로 중단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순진한 믿음이 없음을 당신은 잘 알고 있으며, 당신이 그들을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안다. 심지어 당신은 그들을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간파하고 있다. 게임이론의 개념인 공유지식(또는 공통지식, common knowledge) 가정은 이와 같이 충족된다.
역사적 장면 하나.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명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1799년과 1800년에 노동자들의 회합을 음모로 간주하고 불법화한 결사금지법의 영향으로 비밀스럽고 적대적인 조합 활동이 늘었으며, 또한 각종 보호입법의 폐기로 입헌적 테두리 안에서 구제의 길도 모두 차단되었다. 당국은 더 많은 군대, 더 많은 스파이, 더 많은 체포와 처형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했다. 동시에 산업자본가들이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이용한 갖가지 수단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처지가 갈수록 악화되었고, 새로운 기계로 생산된 형편없는 품질의 제품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손상시키고 산업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기계 파괴 운동은 전쟁과 흉작에 의한 기근 상태에서 일어났지만 단순한 폭동보다는 혁명 의식을 지닌 규율 잡힌 조직 활동에 가까웠다. 러다이트 운동은 고삐 풀린 산업자본주의가 강요한 자유방임의 정치경제, 그로 인한 생계파탄과 다양하고 비열한 착취에 대항하여 옛 권리들을 부활시키고자 한 과거지향적인 만큼이나 미래지향적인 요구였다. 여기에서 기계는 공장체제의 침범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격한 단체의 국기 화형식과 달리 러다이트 운동의 상징적 행위에 대한 일반의 이해는 다른 듯하다. 순진하고 ‘우매한’ 노동자들이 실업의 원인을 공장기계에서 찾고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자들이 순진하고 우매했으리라는 편견은 오염된 사료에 근거하는 역사가들의 왜곡된 해석을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실질적이지만 상징적인 러다이트의 항의는 공유지식이 아니다.
공유지식이 아닌데 공유지식으로 여기거나 그렇게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사실을 왜곡하고, 왜곡된 사실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하며, 나아가 왜곡된 내용을 모두가 믿는 사실로 만든다. 그 중요한 기제를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권력(symbolic power)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상징권력은 권위나 명예 등을 매개로 한 권력의 작용과 재생산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모든 질병의 원인은 환자 개인의 나쁜 생활습관에 있다는 식의 막연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말은, 발화자가 의사일 때 신뢰할 수 있는 진단이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를 굳이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하고 있는 장면이 TV를 시청하는 모든 이에게 익숙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예.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이 자신의 손과 입을 통해 퍼뜨려온 ‘최저임금은 고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라는 주장이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협상이나 SNS 토론창에서 공유지식의 지위를 부여받기에 적절한가? 그렇지 않으면 역시 ‘경제학자’들의 상징권력에 기대고 있는 입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가? 최저임금제는 고용정책이 아닌 임금정책이라는 핵심을 비껴가는 주장이지만, 너무나 유명한 이 주장에 대해 검토해보자.
최저임금의 도입 또는 인상이 고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주장과 그 주장이 기대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 이론을 표현한 그림 1의 왼쪽 그래프는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곡선이다.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종종 마주하게 되는 이 그래프는 시장을 ‘그냥 내버려둘 때’ 달성되는 균형 임금 수준보다 최저임금이 높게 설정되면 고용 규모가 축소됨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다양하다. 노동시장이 완전경쟁이 아닌 수요독점이라는 설명이 대표적지만, 수요공급 곡선이 단순하지 않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림 1의 오른쪽 그래프는 소득과 여가 간의 단순한 대체 관계가 아닌 결합생산(joint production) 관계를 가정했을 때 노동공급 곡선 형태와 다중 균형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이 경우 저임금 균형보다 높은 수준의 최저임금의 설정은 오히려 고용을 증대시킨다.
그림1 .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곡선
출처: 김수현(2011), “국내 저임금 노동자 규모와 특성, 해결방안”, 새사연 보고서; Prasch, R.E.(2000),
“Reassessing the Labor Supply Curve”, Journal of Economic Issues, 34(3), p.687.
최저임금에 관한 경제학적 주장의 내용을 검토하는데 ‘이론’, ‘가정’이라는 용어가 튀어나온다. 저 단순한 그래프 하나를 도출하는 과정에 이론이 동원되고 이론을 뒷받침하는 여러 엄격한 가정들이 존재하는 탓이다. 그러므로 이 논의에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이론을 이해하고 심지어 반박을 하려면 그 가정까지 완벽히 알고 변형시킬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학문을 업으로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의의 타당성을 직접 판단하기 보다는 학자들이 도출한 결과를 믿는다. 최저임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최저임금의 부정적인 효과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듣고, 최저임금의 인상을 기대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효과를 반박하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듣는다. 최저임금이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은 심지어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공유지식이 아니다.
똑같이 훈련받은 경제학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논쟁해 온 역사는 짧게 잡아도 대략 반 세기동안 계속되었고, 인류의 역사에 최저임금제가 출현한 시기 이래로 보면 120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만 28년째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운영해왔는데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을 감소시킨다’는 명제에 대한 논쟁은 어째서 아직도 진행 중인가? 간단히 답하면, 최저임금제를 도입할 때에도 운영하는 중에도 꾸준히 제기된 이 주장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직도 이 주장이 살아있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최저임금의 부정적 고용효과’ 명제의 놀랍도록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은 바로 이 주장의 단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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