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던 시절 이런 궁금함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필요한 것을 얻는 데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꼭 부자가 될 필요가 있을까?’ 무엇이든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이라 필요한 것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 직접 해결하고,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만 시장에서 구입하자는 생각도 했었다. 욕심만 줄인다면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복지와 공공재라는 개념을 알게 된 이후에는 스스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기 어려운 것들을 복지로 해결하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교과서에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벌써 20년도 더 된 오래 전 일이다.
2.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제 구실을 하려면 부는 단순히 재화의 양만을 의미해야 한다. 누가 공급하는 재화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효용을 주느냐에 따라 수요가 늘고 줄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큰 회사가 공급자라고 해서 후광을 받게 된다면 결국 초기에 자본을 많이 축적한 자가 최종 승자가 될 것이다. 큰 회사가 물건을 더 잘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후광 따위가 아니라고 강변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이다. 처음에 부자였던 사람이 결국은 승자가 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데 그 이유가 재화가 많을수록 능력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이를 인정하는 순간 모두가 부유하기를 꿈꾸는 ‘국부론’은 망상에 불과하게 된다.
3.
부가 단순히 재화의 양만을 의미해야 된다는 것은 공정한 경쟁과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정치적으로는 ‘반칙 없는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더 많이 가진 부유층의 반응은, “부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로 요약할 수 있다. 노력의 대가를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더라도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것에 “자유를 주지 않으면 경제를 망가뜨리겠다!”고 위협하는 주장에 유권자 다수가 지지를 보인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는 순진함으로 일관하는 사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도 되어버린 것일까? 충격에 멍한 기분이 들면서 어디에선가 읽었던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주장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대강 ‘프랑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극빈층을 방치하여 이른바 국가 내에 제3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였다. 이러다가는 51%의 안녕을 위해서 기꺼이 49%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4.
반칙 없는 사회를 꿈꿨던 사람들의 정책으로 인해 이른바 ‘부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일 년에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정도의 세금인상으로 상징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미 많은 재화를 가진 분들에게 결코 큰 부담은 아닐 것이다. 수십억짜리 집을 지니고 있지만 통장에 잔고는 없는 일부의 예외적인 상황은 있을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예외적인 상황’ 아니겠는가. 공정함, 사회정의에 대한 반발이 경제적 요인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5.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남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으로 들었소’는 우리에게 ‘그렇게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고 계속해서 말해줍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의 인터뷰이다. 여기에서 ‘무슨 짓’이 뜻하는 주요 행위는 한 동안 시끌시끌하게 했던 ‘갑질’이다. 그런데 사회문제를 ‘갑질’이라는 식으로 희화하거나 다소 가볍게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나 심각함을 흐릴 수 있어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고 따라서 문제의 본질을 풍자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갑질이란 것은 권력을 지닌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부리는 횡포를 뜻한다. 반칙 없는 사회를 위해서 제거하려던 것이며, 공정한 경쟁과 거래를 위해서 처벌해야 하는 범법 행위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갑들은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치활동을 하였으며 승리 하였다. 돈이 많아봐야 재화밖에 모을 것이 없다면 돈을 벌어 무엇 하겠는가. 사람이 일생토록 쓸 수 있는 재화의 양은 의외로 적다. 돈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지위를 얻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돈을 필요 이상으로 모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봉건귀족이 부자로 환생한 것이다. 이보다 더한 퇴행이 있을까.
6.
민주주의국가에서 ‘갑’이 설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갑질’이 표를 얻는 것밖에 없다. ‘갑질’이 표를 얻는다는 건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권위주의와 위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폼 안 나는 고졸대통령보다 민주주의를 억압했지만 경제를 일으켰다는 누군가가 더 존경받는 세상이니까. 사실 경제를 일으켰다는 건 ‘잘 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을 떳떳하게 억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든 것 혹은 공고히 한 것을 덮거나 칭찬해주고 싶어서 만든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보다 더 놀라운 성장률을 보였던 여러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한 채 극심한 양극화로 망가지는 모습을 외면하지 말자.
‘잘난’ 나와 내 아이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원한 결과는 참혹함뿐이다.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은 민주주의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흔히 망각하고 살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손님은 왕이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인식이 민주사회를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 돈을 내는 갑이라서 대우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갑질의 대상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점원이지 그를 고용한 자본가가가 아니다. 왜 우리끼리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형대접, 상사대접, 어른대접, 학력대접, 부모대접, 손님대접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문득 박사인 내가 왜 이런 허드렛일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런 수꼴스러운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버릇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기반인 ‘평등’을 망각하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접을 요구하다니 그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가진 것이나 업적,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갑질’은 영원할 것이다. ‘부자에게 자유를 주라’는 구호에서 ‘자유’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미 헌법에서 보장하는 것, 그래서 모든 국민이 누리고 있는 것 이상의 대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주장이 과반의 지지를 얻고 있다. 왜 애써 민주와 복지의 길을 버리고 독재와 불평등의 길을 걸으려 하는가.
혹자들은 ‘성공에 대한 대접’이 없으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려 하겠는가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대접받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제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빌고 싶다. 이 사회를 봉건시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을 모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접을 바라지 말자. 사랑과 우정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애써 사랑을 민주주의 이념으로 넣은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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