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펀치 417호 : 고루한 여행지라고 평가받는 강화도에 숨어있는 섹시한 대형제습기 <시대와 감성展>한국 미술의 내일을 열다 리뷰(해든뮤지움, 2014.04.01~2014.08.31)
필자는 최근 지인들과 단군이 쌓았다고 알려진 참성단과 삼별초의 항쟁지로 유명한 강화도를 찾았다. 태양이 마니산 꼭대기에 올라있고, 물기를 과하게 머금어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바람이, 순무와 인삼밭에 땀을 뚝뚝 흘리며 지나가는 여름의 작은 섬에는, 관광지별로 촌로들과 여행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고인돌, 박물관, 광성보, 초지진, 참성단, 전등사 등으로 이어지는 강화도의 탄탄한 여행지 행렬에, 최근 날씬한 몸으로 요리조리 몸을 비틀어가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이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해든뮤지움” 이 글은, 그녀의 패션에 대한 홍보를 가장한 관음이다. 그녀는 젊다. 절대로 메워지지 않을 진흙탕 같은 서해의 군사 갈등 속에서 홀연히 예술의 자궁을 열고 태어난 그녀는,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건축 베스트7에 선정되어 한국 건축계에 상큼한 윙크 한방을 날리기도 했다.(걱정 마시라. The New7Wonders의 세계7대자연유산처럼 유료전화 인기투표로 수상작을 선정하는 권위 없는 상은 아니니.) 그녀는 올해 4월부터 <시대와 감성展> “한국 미술의 내일을 열다”라는 옷을 입고 있다. 고승철, 정세원 등 한국 현대 작가 15인의 회화작품 50여점으로 구성되는 이번 전시는, 시대와 감성, 여기에 미술의 내일이라는 추상어들을 마구 늘어놓은 제목을 지음으로써, 그럴 듯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표현하기 너무 어려운 전시를 기획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훌륭한 옷감으로 만든 조화로운 패션에는 오, 우와, 와 등의 “탄성”이 많지만, 훌륭한 옷감이더라도 각각의 문양이 따로 놀고 있는 패션에는 “말”이 많은 법이다. 전시를 보던 날 필자는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전시에 초대된 15명의 작가 중 이 글에서는 눈에 띄었던 고승철, 정세원 두 명의 작가를 다룰 것이다.
고승철 <도심21> 출처: 해든뮤지움 먼저 고승철의 도심 시리즈는 북경의 대표적인 현대작가인 위에민준의 웃음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다. 둘의 차이라면, 위에 민준의 웃음 속에는 문화대혁명의 날카로움과 천안문사태의 처절함이 깊게 벤, 13억 중국인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완결성이 있지만, 고승철의 그것은 자본주의적 국민국가 속에서 개체화된 화이트칼라만의 처연함으로 표현이 한정돼 있었다는 것이다. 도심 시리즈는 시선을 문단으로 돌리면,『현대문학』2012년3월호에 수록됐던 포스트IMF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인 최진영의「어디쯤」을 연상하게 했는데, 아버지가 가라고 한 어딘가를 가야만 하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 행인은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여기서 나갈 생각을 말라는 거죠.”, “그렇게 자꾸 의심할 거면 따라오지 마요. 각자 가자고, 각자.” 결국 화가 고승철과 소설가 최진영이 예술을 통해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손을 저리도록 뻗어도 잡아주는 이 없는, 아버지가 가라고 한 곳을 가야만 하는 과잉억압시대에, 가고만 있는 실행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행인들이 가진 “뛰쳐나가려고 하는 자연성”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세원의 유년기 시리즈는 장지에 수묵담채, 콘테, 색연필 등을 활용하여, 액션페인팅 효과를 주고 있다. 조각 등의 3차원은커녕 평면에 사실화나 세밀화로도 자세히 기억되지 않는, 혹은 기억될 수 없는 순수했던 관객의 유년기는 얼굴들은 알아볼 수 없도록 번져있다.
정세원 <유년기> 출처: 해든뮤지움 도동 광주역 내려 8번 버스 타면 도동이란 동네 있지요 예부터 도둑 많아 붙여진 이름이지요 나는 국민학교 도동에서 다녔지요 하루는 자다 깨니 사자使者가 아버지 훔쳐갔지요 결국은 엄마 순정도 훔쳐갔지요 그래도 도동은 주는 것 있었으니 옆집 신자누나 내 머리 만날 쓰다듬었지요 내가 새 옷 입는 날이면 우리 청연이 멋쟁이네 놀리는 게 일이었지요 나이 먹어 도동에 가보았을 때 우리집 사라지고 없었지요 아빠가 잡은 미꾸라지도 그것 먹고 생긴 엄마 똥배도 없었지요 재개발로 지어진 아파트만 숲 같았지요 나는 가만히 놀이터 그네 타며 기억 더듬었지요 놀이터엔 신자누나 닮은 아줌마 아이랑 모래성 쌓고 있었지요 나는 그녀에게 말 걸어보려다 그만 두었지요 도동이 그녀의 모래성 이미 훔쳤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지요 필자가 정세원의 유년기 시리즈를 보고, 미술관 2층의 카페에서 지은 짧은 시이다. 어느덧 형태만 남아있는 해마의 닳은 편린들을 긁어모아 정세원의 허락 없이 제발을 붙였다. 그림 속 인물들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썰물이 되어 서쪽으로 흘러갔지만, 그림을 보는 관객의 유년은 서해의 일몰처럼 쓸쓸한 밀물이 되어 섬으로 흘러오고 있다. 두 명의 작가를 제외하고 한지에 채색 기법을 활용한 나형민의「지평」, 점·선·면으로 종결된 추상화가 박현주의 「무제」, 캔버스에 오일로 화려한 색상이 인상 깊었던 허정수의 「꽃」등 한국의 현대회화를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으나, 너무 광범위한 주제로 인해, 필자에게는 작품은 남고 전시는 남지 않는 미술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국내 미술 지형 상, 다양한 미술을 접할 수 없는 도민들을 배려하기 위해, 큐레이터가 폭넓은 전시를 기획하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도 한편으로는 든다. 아무리 시원한 바람이 불어도 습도가 떨어지지 않으면 더위와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접근성과 콘텐츠의 우위로 인해, 여행지로 강화도를 선택하는 독자에게 말한다. 여행의 습기는 자동차의 에어컨 바람이 식혀준 것이 아니라, 강화도에 숨어있는 대형제습기 해든뮤지움이 씻겨줬다고. 이탁연 <해든뮤지움> 디지털프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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