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고통 08 – 窮理(궁리)


 


  지난 9일 고속버스가 칠곡휴게소를 지날 때부터 빗줄기는 굵어졌다. 줄줄이 이어선 그 버스들은 희망버스라고 불렸다. 얼마 전 어둠의 복판에서 한 친구는 말했다. 그 이름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절망스런 우리 사회 현실의 반영이기에 오히려 절망버스라 이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깊은 한숨 뒤에 숨은 그녀의 고통과 회한은 짙은 담배 연기로도 감출 수 없었다.


 


  부산이 고향인 그녀에게 김진숙은 각별해 보였다. 故 박창수, 故 김주익, 한진중공업에선 습관처럼 한 생명과 맞바꿔 자본의 야욕을 잠시 억눌러왔을 뿐이라 했다.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검 앞에 오열하던 몇 해 전 그녀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시대의 한 자락쯤을 나란히 넘어왔을 김진숙, 그이가 다시 모진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소식은 그녀를 무너뜨렸다. 여전히 생명을 담보로 도박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했고, 알면서도 그 길로 갈수밖에 없는 김진숙 그이의 처지를 생각하며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들의 아득한 절망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일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지난 5월 31일 오후 2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까지 긴 회의를 통해 이 나라의 진보를 자처하는 두 당과 각개 시민단체들은 진보대통합안을 도출했다. 어떤 이는 환호하고 어떤 이는 절망했으며, 또 어떤 이는 분노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러한 모든 감정표현으로 부터도 배제되었다. 내 방식으로 축약하자면 ‘각 사대부 가문내의 아름다운 가법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적서의 차별을 인정하되 사회통념상 호부호형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참으로 난감한 결론이었다. 소설 속 홍길동은 끝내 조선을 버리고 율도국을 건설했다. 물론 내 좁은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그 누구도 그 결론을 통해 ‘조화로운 미래’를 꿈꾸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날 9시가 조금 못되는 시간에 부산역 앞에 도착했다. 빗줄기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고 나이 어린 친구와 동행했던 나는 우비부터 마련해야 했다. 그 시점부터 내 모든 관심과 주의는 그녀의 안전과 무사한 귀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제 중학교 2학년,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그녀석의 눈동자엔 비에 젖은 수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잠깐의 공연과 대회사를 뒤로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생소한 구호들과 노랫말들, 그리고 오랜 차도행진,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친구는 조금 힘들어했다. 빌려 신었던 운동화는 끝내 말썽을 부렸고, 우리는 비를 피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가쁜 숨을 돌릴 잠깐의 휴식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 6월 26일 진보신당에선 ‘5.31합의문 승인’을 두고 길고 긴 당대회가 열렸다. 5.31합의로부터 주어진 시간은 진보신당내의 많은 이견들을 조율하기엔 너무 짧아보였다. 그래서인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내 눈에도 그들의 논의는 괴로워 보였으며, 힘겨운 만큼 진지하고 치열해 보였다. 통합파 독자파 하나로파 그리고 어떤 입장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소수자들은 서로의 입장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으나, 결코 결론마저 동의하긴 어려워 보였다. 그 날의 결론은 얼마간의 규칙위반을 통한 시간 벌기였다. 저마다의 입장에서 그들은 진심으로 비통해했다.


 


  빗속을 뚫고 도착한 봉래동 사거리에서 행진은 경찰의 차벽에 가로막혔다. 백기완 선생은 노구를 이끌고 방송차위로 올랐으며, 김진숙 그이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마다치 않았던 발걸음들은 봉래동 사거리에 묶여 밤을 새웠다. 대열의 앞쪽에선 차벽을 넘기 위한 힘겨운 시도들이 이어졌고, 그에 따라 경찰의 폭력은 점점 그 강도를 더했다. 김진숙도 백기완도 생소했을 내 어린 친구의 의문은 정의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차도를 행진하던 시민들과 그들을 막아선 경찰들 중 누가 정의인가? 나는 정의의 편인 것인가? 하는 것이 그녀가 가진 질문의 핵심으로 보였다.


 


  다만, 함께 한 이들에 대한 신뢰, 또한 그녀의 참석을 어렵게 결정한 부모님에 대한 신뢰가 그 흔들림을 잡아주는 듯 보였다. 필리핀의 수빅 조선소에 대한 이야기, ‘한진중공업’과 그 모회사인 ‘한진홀딩스’에 대한 조남호 일가 등 지배주주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추어지긴 했으나, 한진중공업의 손실이 그 회장인 조남호 일가에겐 커다란 이익이 될 수도 있다는 금융자본주의의 마법을 설명하기엔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어렵게 입을 떼어 던져온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참으로 곤궁한 것이었다. ‘사소한 잘못들을 제외하면 한진중공업과 경찰들은 합법적이다. 하지만, 합법적인 것이 언제나 정의인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그들은 부도덕하다’라고……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그 대답에도 내 어린 친구는 안도했으며, 그 안도는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는 쇠된 구호로 표현되었다.


 


  새벽 2시 반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들이닥쳤고, 대오의 중간쯤에 선 우리의 몸 곳곳은 최루액으로 뒤덮였다. 나는 놀라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도로 오른편의 골목으로 들어갔으나 그곳에도 경찰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우르르 몰리는 시민들과 그 뒤를 ?는 경찰들을 피해 ‘뛰면 안 된다’ 다독이며 봉래동 사거리 대각선 방향의 불 켜진 건물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고통을 내색치 않고 최루액에 화상 입은 시민들에게 물수건을 건네고 수돗가를 안내하던 그녀. 또한 대오의 중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앞쪽에서 물이 필요하다는데 왜 아무도 물을 사러가지 않느냐고 항의하던, 끝내 내 손을 잡아끌고 생수를 구입해 의료진에 전해주던 내 어린 친구의 모습에서 얼핏 희망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지켜야 하는 가치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지난 ‘5.31합의’와 ‘진보신당 당대회’ 참가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슬픔과 분노마저도 희극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얼핏 같아 보이는 두 모습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易(역) 窮則變(궁즉변) 變則通(변즉통) 通則久(통즉구)” 라는 신영복 선생의 주역에 대한 요약을 생각했다. 비통한 시간벌기는 내부적 괴리와 외부의 여건 앞에 절체절명으로 내 몰린 그들의 窮理(궁리)라는 생각으로 숙연했다.


 


  다시 김진숙 그이를 생각했다. 전 날 우리는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 목소리만 전화 중계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많이 지친 듯 들리긴 했으나 아직 무사함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날 희망버스에 몸을 실은 많은 이들은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타인의 상처에 민감한 법이다. 상처 입은 짐승들처럼 타인의 상처를 보듬고 핥을 수 있는 내 어린 친구의 가슴속에는 도대체 어떤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몹시 두렵기만 했다. 희망버스가 결코 희망을 실은 버스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희망이란 손에 잡을 수 있는 실체가 아니라 절절한 그리움으로 우리가 만나러 가야할 그 무엇일 터였다. 끝내 만나지는 못했으나 만나야 할 김진숙 그이에 대한 확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무사히 우리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의 窮理(궁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곤히 잠든 어린 친구를 바라보며 소통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소통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외면하지 않고 고통과 마주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불의에 쉽게 흥분하던 친구의 분노가 증오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또한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으론 그 지독한 사슬을 끊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모든 진실을 감당하기에는 내 친구의 속살은 아직 여리게만 보였다. 고단한 몸을 기차에 누인 그녀를 바라보며 내 손에 놓인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으로 나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p.s 내내 서연이를 돌봐주고 보살펴주신 정달현, 이보라 두 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