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밤 9시경 홍익대학교 앞에 도착했다.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어져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마음이 어두운 탓인지 학교 정문 너머 저편의 어둠은 더욱 깊어보였고, 깊은 어둠으로부터 바람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바람을 헤치며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여전히 비틀거렸다. 말 아닌 말들이 버젓이 말의 모양을 하고 떠돌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참혹한 일들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까닭이었다. 지독한 무력감은 땅 밑으로부터 솟아올라 발목을 움켜잡았다.


 


  얼마 전 홍익대 청소,시설,경비 노동자들은 단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했다. 12월 31일 이라고 했다. 최저임금에도 턱없이 모자란 75만원의 봉급과 월 9천원 식대의 부당함을 호소하려 했다는 것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조금 더 개선하려고 했다는 것이, 사람으로 났으니 같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싶어 했다는 것이 집단해고의 이유라면 이유일 터였다.


 


  느닷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은 어색한 팔뚝질로 ‘해고 철회’를 호소해야만 했다. 칼날 같은 바람 앞에 몸을 세워야 했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지친 몸뚱이를 뉘어야 했으며, 혹시나 더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은 끝내 잠들지 못하는 밤들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시점에 학교의 총학생회장이 그곳을 찾았다고 들었다. ‘시험기간이니 집회를 멈춰달라고, 당신들의 사정은 이해하나 외부세력의 개입은 묵과할 수 없다고’ 참으로 난감한 이야기를 건넸다고 들었다.


 


  한 동안 ‘무지(無知)도 죄(罪)’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옭죄었다. 물론 그 죄는 스스로도 이 저주받은 시대를 간신히 버텨내는 홍대 총학생회장만의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분명 암울한 교육현실과 갈수록 약육강식으로 치닫는 이 사회의 비정함에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이며, 나아가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들의 무관심에 더욱 큰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죄를 홀로 뒤집어 써야 했을 홍대 총학생회장으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무척 안쓰럽게 여겨졌다. 하지만 약자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들의 무지는 더 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들이 이 사회의 중추가 되는 내일의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날 홍익대 문헌관 1층에선 몇 해 전 젊은 날의 내 어머니 아버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당신들의 목소리를 낸다는 일이 조금은 어색하고 그만큼 불안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내내 코끝이 시큰했다. 사회자의 갑작스런 요청에 곱은 손으로 기타를 잡아야 했다. 거친 기타반주에 익숙지 않은 노래를 한 소절 한 소절 정성껏 따라 부르던 젊은 날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에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내게 대학이란 세상의 숲 같은 곳이었다. 온갖 탁기를 정화하는 마지막 숨통 같은 곳이었다. 그 숲 속 가장 낮은 곳에 청소,시설,경비 일을 하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다.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대지의 자양분을 줄기에, 잎사귀에, 마침내 열매에까지 공급하는 뿌리의 역할을 마다않는 분들이 청소,시설,경비 노동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가지나 열매와 달리 뿌리가 마르면 나무가 죽고 마침내 숲이 죽는다는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추스르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선배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때 홍익대의 총장이었던 ‘이항녕 박사’의 절절한 반성(反省)에 대한 이야기였다. 생각이 짧아서일까? 여전히 나는 돌이킬 수 있는 잘못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인간이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한 유효할 것이다. 모든 잘못은 저질러진 시점에서 이미 과거의 화석으로 굳어진다. 그런 까닭에 진실한 반성은 그만큼 어렵고 값지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잘못을 돌이키려는 욕심이 없는 까닭이다. 있는 그대로 치욕을 드러내는 것을 제 소임으로 하는 까닭이다. 다만, 진실한 반성은 잘못의 재발을 막는 힘을 가진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절절한 반성이 있는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희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