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고통 02 – 디스토피아


 


  한동안 하늘은 내내 울기만 했다. 끊임없는 눈물을 가능케 할 만큼 커다란 슬픔을 짐작해보기란 내겐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일이다. 다만 하늘이 흘려보낸 큰 눈물로 인해 더하게 될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이 걱정될 뿐이다. 나는 사람들의 눈물이 가장 무섭다.


 


  지난 6월17일부터 9월5일까지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선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 기간 중 이곳에선 주한 미국 대사관 자료정보센터에서 ‘미국 외교부 내 동성애자 모임(GLIFAA, Gays and Lesbians in Foreign Affairs Agencies)’ 주한 미국대사관 지부가 주최한 ‘동성애자 인권 강연회’가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행사는 ‘주한 미국 대사관 자료정보센터’로 장소가 변경되어 치러졌다. 예정된 행사의 번복에 대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밝힌 입장은 참으로 궁색한 것이었다. “국가기관으로서 이미지가 걱정되고”, “한국에서는 아직 동성애 인권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불허의 이유였다. ‘키스 헤링’은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운동가였다. 이번 전시회는 그의 작품은 빌려왔으나, 차별에 저항했던 그의 작품세계와는 아득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영화 <미션>은 17세기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스페인, 포르투갈의 영토분쟁과 이를 방관하던 교황청의 추악한 모습을 배경으로, 원주민들과 함께 저항했던 두 신부의 모습을 그렸다. ‘가브리엘’과 ‘로드리고’ 두 신부가 보여준 저항의 모습은 무척 상반된 것이었는데, 영화를 처음 보던 당시 나는 그 둘을 차마 구별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얼마 전 진보진영의 현실진단과 앞으로의 방향을 정리하기 위한 ‘김규항’, ‘진중권’ 두 고수의 논쟁이 있었다. 아니 지금은 단지 소강상태일 뿐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때문일까? 나는 둘의 생각을 모두 긍정한다. ‘진중권’의 빼어난 현실인식을 옹호하는 만큼 ‘김규항’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귀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 보여서 한없이 무서울 뿐이다.


 


  영화는 살아남은 과라니족 아이들이 줄 끊어진 바이올린을 들고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드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빛이 어둠을 비춰도,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 1장


 


  최근 종로6가와 을지로6가를 잊는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개명하기 위한 시민들의 켐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사람 없는 새벽에야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그와 한 참을 바라보다 문득 ‘이제 내가 형이네’ 하는 생각에 실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찾아온 건 귓불이 타는 듯한 부끄러움이었고, 끝내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끅끅 거려야 했다.


 



 


  ‘미션’의 테마 곡인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가사를 붙여 부른 곡이 ‘내 환상 속으로’라는 뜻의 ‘Nella Fantasia’이다. 그 곡을 부를 수 있도록 작곡가의 허락을 받기 위해 무려 3년을 2달마다 편지로 간청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유명한데, 그러한 ‘사라 브라이트만’의 열정만큼 자신의 작품세계에 틈입을 허락한 ‘엔리오 모리꼬네’의 쉽지 않은 결정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뜬금없이 보색대비를 생각했다. 한 동안 한 가지 색(물론 유채색이다.)을 바라보다 시선을 백지로 옮기면 그 색의 보색이 잔상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건 일종의 환상이다. 시신경을 통해 색의 인상을 뇌로 보낼 때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그 균형을 잡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에버랜드의 셔틀버스는 ‘everland’라는 영문 표기 옆에 愛寶樂園(애보낙원)이라는 참으로 민망한 문구를 달고 오늘도 거리를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