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성희롱, 내내 거짓말

By |2010/07/21|Categories: 새사연 칼럼|0 Comments

한나라당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국회의원 강용석은 과연 달랐다. 자신의 주선으로 청와대 행사에 참석했던 연세대 여학생에게 “그때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고 말했단다. 여대생에게 건넬 소리가 결코 아니다. 강용석은 더 나갔다. “옆에 사모님(대통령 부인 김윤옥씨)만 없었으면 네 번호도 따갔을 것”이라고 언죽번죽 덧붙였단다. 궁금하다. 강용석의 눈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람됨은 어떻게 보였을까.아나운서를 지망하는 여학생에게 한 말은 더 놀랍다.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단다. 여성 아나운서들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여학생이 “특정 직업인이 성 접대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들렸다.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고 밝힌 대목은 상황의 심각성을 증언해준다.강용석에게 대통령과 아나운서는 어떤 모습일까더구나 강용석은 특정 사립대학을 지칭해 “○○여대 이상은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못한다”고 말했다.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도발만이 아니다. 학벌에 찌들대로 찌든 내면의 폭로만도 아니다. ‘○○여대 이하’에 대한 [...]

이명박의 자주, 김남주의 매국

By |2010/07/13|Categories: 새사연 칼럼|3 Comments

애써 참으려 했다. 날을 세워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한다고 과연 달라질 가능성이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0년 6월27일 이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2015년 12월까지 미국이 보유하는 데 합의했을 때도, 차라리 오바마에게 편지(‘오바마 미 대통령에 띄우는 편지’ 2010년6월28일)를 쓴 이유는 그가 얼마나 자주성이 없는가를 드러내고 싶어서였다.하지만 보라. 이 대통령은 7월12일 라디오방송 연설에서 “일각에서는 전작권 전환시기 조정에 대해 국방자주권을 들어 비판하지만 시기조정은 우리의 필요에 따른 실질적이고 자주적인 선택”이라고 언죽번죽 말했다. 아무리 톺아보아도 놀라운 발언이다. 그래서다. 이 대통령의 자주권 훼손을 이미 칼럼에서 지적한 내가 대통령의 ‘반론성 발언’에 침묵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이명박 대통령의 놀라운 ‘자주’ 발언내가 대통령의 발언을 놀랍다고 본 일차적 이유는 그의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대통령은 “유럽에는 많은 강국이 있지만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나토가 지역안보의 기본 틀”이라며 “우리의 [...]

KBS 왜 ‘국민의 방송’인가

By |2010/07/12|Categories: 새사연 칼럼|1 Comment

왜 국민의 방송인가. 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파업출정식에서 스스로 던진 ‘화두’다. 기실 KBS가 걸어온 길을 톺아보면 국민의 방송이라는 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특보가 사장 자리에 앉았기에 더 그렇다. 시청자 사이에 ‘땡이뉴스’라는 우스개가 퍼져갈 정도다. 더러는 과장이라고 눈 홉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땡전뉴스’와의 사이에 놓인 30년 세월을 감안해보라. 결코 부풀리기가 아니다. 이 대통령이 어린이날 행사에서 찧은 엉덩방아까지 ‘찬양’하는 보도에선 이승만의 방귀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며 부닐던 장관의 구린내가 묻어난다.국민의 방송이 아니었는데도 시청자들이 KBS의 그 ‘참칭’을 용인해온 까닭은 간명하다. 국민으로부터 수신료를 받는 공영방송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민의 방송이 소임을 다하지 못할 때 불거진다. 그래서다. 언론노조 KBS본부가 파업에 들어갈 때, KBS 경영진의 반응은 차라리 놀랍다. “30년 숙원인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전사적 역량을 기울이는 중차대한 시기”에 파업은 “해사행위”란다.수신료 인상 국면에 파업은 해사행위?국민의 방송을 ‘권력의 방송’으로 [...]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지 않을 때

By |2010/07/09|Categories: 새사연 칼럼|1 Comment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의 발전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 보고서에서 제시된 자연과학을 위한 프로그램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중략) 과학이 그 자체로 개인, 사회, 경제적 병폐를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전시던 평시던 간에 이 모든 분야들이 팀으로 기능할 때에만 과학은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진보가 없다면 다른 방향에서 이룩된 진보는 우리의 건강과 부의 창출, 국가 안보를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1]. 바네바 부시 <과학- 끝없는 미개척지> 중에서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기초과학자들은 더 이상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연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순수과학에 대한 19세기의 이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초연구는 단기적 혹은 중장기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들은 연구계획서의 대부분을 연구결과가 사회와 신약개발에 미칠 가능성에 대한 언급으로 채운다. 화학자들과 [...]

문수 스님의 ‘불편한 진실’

By |2010/07/08|Categories: 새사연 칼럼|2 Comments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어느새 잊혀가고 있다. 그래서다. 7월8일 조계사에서 4000여 명의 조계종 스님들이 문수 스님을 추모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한다는 소식이 반갑다.수행 중인 한 스님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려 했음에도 대다수 사람에게 시나브로 잊힌 이유는 분명하다. 공론장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가령 2010년 5월31일, 문수 스님이 정치권력을 질타하며 소신공양을 결행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들은 소신공양을 아예 모르쇠 했다. 가령 <조선일보>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신공양 사실을 보도할 때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신공양은 보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소신’ 탓일까.스님의 소신공양 잊혀가는 이유기실 문수 스님이 낙동강 방죽에서 소신공양을 하기까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스님이 수행에 정진해온 정갈한 방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문뭉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스님이 세속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문이었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

조선일보 주필의 참 이상한 고민

By |2010/07/02|Categories: 새사연 칼럼|4 Comments

대한민국,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의 칼럼 제목이다(2010년 7월2일). 미리 밝혀두거니와 나는 강 주필의 우국충정에 공감한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것이 분명한 나 같은 세대는 요즘 나라의 장래와 관련한 상서롭지 못한 예감에 몸을 뒤척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는 강 주필의 토로에선 진정성을, “역사를 돌아봐도, 신문을 펼쳐도 이 어둠침침한 그림자가 뒤에 따라붙는 듯하다”는 대목에선 절박성을 느낀다. 강 주필은 전쟁 시기의 영국과 일본을 비교한다. “50세 이하 영국 귀족의 20%가 1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귀족과 명문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노동자·농민보다 몇 배 높았다”고 쓴다. 반면에 “(2차 대전 당시) 일본 귀족과 제국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1·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귀족과 옥스퍼드·케임브리지 출신 전사자 비율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낮았다”고 분석한다. 종전 후 이 같은 통계숫자를 확인한 일본 역사가들은 2차 대전이 이길 수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