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역사의 과도기를 살고 있다. 낡은 질서는 물러가고 있으나 새로운 질서는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과도적 혼돈이 발생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 이럴 때 낡은 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으면 패착을 범하기 쉽다.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진보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해야할 책무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진보 안에는 낡은 관념들이 진보의 꼬리표를 달고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본 연재는 무엇이 낡은 관념인지를 시대 상황 변화에 비추어 드러내고자 한다. 낡은 관념들이 어떻게 변화와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 글은 기획 연재의 첫 시작이다. 포괄적인 문제의식을 던지는 글이다. 앞으로 어떤 주제들을 다루어야 하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짚어보는 글이기도 하다. 소재는 최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문재인 정부 임기 초반을 대표한 정책이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분배 개선을 통해 성장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 성장론을 구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으니 하위 계층의 소득이 상승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지속된 하위 20% 계층의 소득 감소는 최저임금 인상이 추진된 2018년 1분기에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크게 흔들렸다. 결국 홍장표 청와대 경제수석을 포함해 소득주도 성장론을 주도했던 수석 비서관 3인이 경질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와 여당은 애써 기조에 큰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지만 소득주도 성장론이 실패에 직면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주장에 대해 펄쩍 뛸 사람이 많겠지만 전후 인과 관계를 짚어보면 사태의 본질은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문재인 정부가 놓친 두 가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크게 봐서 두 가지 지점을 소홀히 했다. 이는 생각하기에 따라 치명적인 지점일 수도 있다.

 

먼저 저성장 국면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분배 자체도 쉽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 현재 한국 경제는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산업 대부분이 성장 동력을 상실하면서 저성장 늪에 빠져 있다. 저성장 국면에서는 기업의 지불 능력이 취약해지면서 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재분배 여지가 그만큼 적어진다. 증세 역시 여의치 않다. 소득 증가가 미미한 조건에서 증세가 이루지려면 기업은 투자를, 개인은 소비를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불황기 증세를 시도한 정부들이 예외 없이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던 이유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론과 더불어 쌍끌이 성장 전략의 또 다른 축으로 혁신성장론을 함께 추진했다. 하지만 아직은 소식 감감하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론과 비추어 그 밥에 그 나물 아니냐는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름에 걸맞은 혁신적 방안이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보수 매체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규제 완화 이외에 다른 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간과했거나 소홀히 다룬 또 다른 지점은 ‘시장의 역습’이다. 이와 관련해 비교적 시장 동향에 밝은 사람들은 상식적인 이야기를 쏟아내 왔다. 시장의 역습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해외 이전. 세계화와 함께 국경을 뛰어넘어 기업의 해외 이전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어 왔다. 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인천과 마주하고 있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 도시 한 곳에만 한국계 중소기업이 1만 개가 넘는다. 둘째 자동화. 한국은 자동화를 통한 노동의 기술적 대체가 가장 빠르면서도 폭넓게 진행되고 있는 나라이다. 단적으로 산업 로봇 사용률에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셋째 투자 축소. 기업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환경이 만들어지면 투자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미 10대 그룹 중 6곳이 연초 계획보다 투자를 축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저임금 인상 조치가 세 가지 형태 시장의 역습을 어느 정도 강화했는지는 정확한 검증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그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시장의 역습이 주로는 하위 계층 몫인 단순 작업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감소시킨다는 데 있다. 하위 계층 소득 감소로 이어질 공산이 큰 것이다.

 

시장의 역습에 무방비로 노출되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 안에는 시장의 역습에 대한 대응책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매우 위험스런 지점이다. 상대의 역습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공격을 감행했을 때 남는 것은 자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을 예정된 실패로 규정할 수도 있는 여지이다.

 

진보 안에는 ‘계속 공격 앞으로!’를 외치며 소득주도 성장론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시장의 역습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시장의 역습에 대한 인식조차 흐려져 있다. 그들은 단순하게 문재인 정부의 의지가 약해서 문제인 것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하다. 상대의 역습으로 자칫 자멸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병사들에게 ‘무조건 공격 앞으로!’ 만을 외치고 있는 셈이다.

 

오해 없기는 바란다. 시장의 역습을 강조한다고 해도 후퇴만이 능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보수 매체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로 시장의 논리에 순응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는 시장의 역습까지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해법을 찾는 것이다. 과연 한국 경제의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종전처럼 최저임금만 올리는 식으로 원하는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간의 경험은 이에 대해 부정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틀 자체를 바꾸는 파격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여러모로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불가에서 깨달음의 촉매제로 삼는 화두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보자.

 

불가에 전해져 내려온 화두 중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여기 병 속에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다. 새가 자라서 입구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병을 깨지 않고 새를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둘.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방 안에 있는 나를 손대지 않고 밖으로 나가도록 할 수 있겠는가?” 셋 스승이 마당에 원을 그린 다음 어린 동자승에게 문제를 냈다. “네가 이 원 안에 있으면 하루를 굶고, 밖에 있으면 절에서 쫓겨난다. 선택을 해라!”

 

답은 이러했다. 세 번째 답. 동자승은 빗자루로 마당의 원을 지워버렸다. 두 번째 답. 제자는 “방 안의 스승님을 밖으로 나오시게 할 수는 없으나 밖에 계신 스승님을 방 안으로 들게는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은 “좋다 그렇게 해 봐라!”라며 밖으로 나왔다. 제자는 스승을 손 안 대고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 답. 한 제자가 “새는 병 밖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스승은 만면의 미소를 지었다.

 

말장난이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첫 번째 답에 대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말장난이 아니다. 세 가지 질문과 답에는 공통적인 구조가 존재한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주어진 질문 속에 수동적으로 갇혀 답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는 데 있다. 동자승이 원을 지운 것은 주어진 문제를 부정한 것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이야기 속 제자는 질문 대상에서 질문을 만드는 주체로 전환했다. 첫 번째 이야기 속 제자는 주어진 상황에 매이지 않고 상황 자체를 전혀 새롭게 설정했다. 모두가 주어진 질문 틀에 갇히지 않고 능동적 입장에서 새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해답을 찾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불가의 참선 수행 역시도 자신이 어떤 관념에 갇혀 있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직시하는 과정이이라 할 수 있다.

 

<측적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개념 설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개념 안에서 사고한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 이를 통해 세상을 지배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한 때 휴대폰은 이름 그대로 ‘손에 쥔 통신기기’로 통용되었다. 스티브 잡스는 ‘손 안의 컴퓨터’로서 스마트 폰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왜 벤처기업들은 해외이전을 하지 않나?

 

왜 많은 진보 인사들이 현실 한복판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는 시장의 역습에 대해 둔감하거나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시장의 역습이 대단치 않았던 시기에 형성된 낡은 관념 안에 갇혀 있기 때문 아닐까?

 

과거 시장에 대한 국가의 우위가 확고히 유지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관계가 역전되었다. 과거 경제가 국민경제 틀 안에서 작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계화와 함께 경제적 의미의 국경선이 지워졌다. 2차 산업혁명 시기 생산의 증대는 고용의 증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 이후 생산이 늘더라도 고용이 줄어드는 현상이 확산되었다. 유사한 환경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지금 우리는 낡은 질서가 물러가고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어야 하는 역사의 과도기를 살고 있다. 낡은 과거와 새로운 미래가 충돌하는 시기이다. 변화된 시대 상황은 전혀 새로운 문제 설정과 해법을 요구한다.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한 예 하나. 세계화 시대임에도 벤처기업들이 해외이전을 잘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