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아보면, 혁신은 단지 사람들에게 어떤 보상을 준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았다. 혁신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을 때 비로소 일어났다.”

– 과학 저술가 스티브 존슨(Steve Johnson)

 

지방선거를 앞두고 ‘리빙랩(Living Lab)’이란 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각 당과 후보들이 앞 다퉈 ‘스마트 시티(Smart City)’ 조성 공약을 내놓고 있어서다. ‘똑똑한 도시’를 만드는 데 ‘사용자 중심 열린 혁신 생태계’인 ‘리빙랩’을 활용하겠다고들 말한다.

 

우리에겐 아직 낯설지만 유럽에선 벌써 2006년에 20여개의 리빙랩들이 모여 유럽리빙랩네트워크(ENoLL, European Network of Living Labs)를 꾸렸으니 우리보다 10년은 더 앞서 있는 셈이다. 지난 5월 3일, ENoLL은 ‘리빙랩 프로젝트 어워드 2017’ 선정 소식을 전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진행된 리빙랩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만한 세 개를 투표로 뽑았다. 24개의 리빙랩이 지원했고, 약 2,000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오늘날 리빙랩은 어디쯤 와있나

 

‘캡틴(CAPTAIN)’은 그리스의 Thess-AHALL(Active and Healthy Ageing Living Labs)와 프랑스의 PAILLON(PAsteur Innovative Living Lab Of Nice 2020)이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노인들이 오래도록 집에 머물며 스스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돕는, 똑똑한 가사 도우미를 제공하는 실험이다.

 

구상은 이렇다. 먼저 집안 곳곳에 작은 프로젝터들을 설치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거주자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가까운 벽이나 탁자 위로 영상을 비춰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준다. 가령, 요리를 할 때면 부엌 벽에 레시피 영상을 비추고, TV를 보다 물이 끓으면 가스레인지를 끄라는 영상을 탁자에 쏜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침실 벽에 큼지막하게 책을 펼쳐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영상이라는, 눈에 잘 띄는 인터페이스를 활용한다는 점이 좋다. 또 더 이상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면 영상은 저절로 꺼진다. 지금까지의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동안 노인을 위해 개발된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들이 정작 실험실 밖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거나, 거주자가 집을 낯설게 여길 만큼 복잡한 장치와 사용법을 필요로 했던 것에 비춰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캡틴 프로젝트가 이렇게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사용자와 이해관계자들을 모아 만든 ‘캡틴 이해관계자 공동체’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프로젝트를 이끈 이들은 이 공동체의 의견을 ‘(개선) 요구의 유일하고도 공식적인 원천’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사용자에게 얼마나 많은 권한이 주어지느냐가 왜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ENoLL도 “출발부터 사용자를 참여시키는 것이 어떤 활동에서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한다. 사용자가 혁신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용자에게 그만큼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리빙랩을 리빙랩답게 만드는 건 바로 이것이다.

 

리빙랩의 정신적 뿌리는 유럽의 참여와 협력 디자인

 

리빙랩이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리빙랩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진 않다. 리빙랩을 이루는 핵심 개념인 ‘사용자 중심 열린 혁신’의 흔적은 오히려 유럽에 더 뚜렷하게 남아 있다.

 

북유럽에선 일찍이 ‘참여와 협력 디자인’ 흐름이 나타났다. 1960~70년대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은 노동자 참여 IT 어플리케이션 디자인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 IT가 일터를 벗어나 점차 삶의 영역으로 스며들면서 협력과 참여 디자인의 흐름도 자연스레 퍼졌고, ‘사용자 중심 디자인(UCD, user-centred design)’이 의미 있는 접근법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엔 새로운 ICT가 실험실 밖의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거치며 다듬어졌다. 이어 1990년대엔 ‘디지털 시티(Digital City)’의 바람을 타고 참여와 협력 디자인의 흐름이 도시라는 더 넓은 공간으로 퍼져갔다. 시민(사용자)과 정책 개발자(공공기관), 민간기관(기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발을 맞춰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오늘날 ‘스마트 시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선 2000년대 들어 MIT의 미첼(W. Mitchell) 교수가 첨단 ICT에 최적화된 미래의 집을 설계하고자 연구 그룹 House_n을 꾸리고, 아파트를 개조해 ‘플레이스랩(PlaceLab)’을 만들었다. 주방과 침실에 가스레인지와 냉장고, 세탁기 등을 두루 갖춘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들은 길게는 몇 주씩 머물렀고, 연구자들은 수십 개의 카메라와 센서로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분석했다. 미첼 교수와 연구 그룹은 플레이스랩을 설명할 때 ‘Live-in Laboratory’, 또는 ‘Living Laboratory’란 표현을 쓰곤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리빙랩’이란 말이 제몫을 찾게 된 건 미첼 교수가 유럽 ‘인텔리전트 시티즈(Intelligent Cities)’ 프로젝트 자문 그룹에 참여하면서다. 그러니까 “유럽에 널리 퍼져있던 리빙랩 개념이 미국에서 출발한 집을 본 딴 실험실(home lab)에 대한 근본적 재해석을 제공”한 것이다(ENoLL). 아울러 ‘플레이스랩’은 사용자의 수나 역할이 아주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리빙랩에는 한참 못 미쳤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리빙랩은 어떠해야 할까

 

“ENoLL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주요한 시대적 변화는 ICT 혁명에 더해 다양한 행위자 간 협력 모델과 사용자 개입에 대한 늘어난 관심이다.”

– 가르시아(Garcia)

 

과학기술을 빼고 리빙랩을 말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리빙랩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용자를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라는 두 개의 바퀴로 움직여 왔다. 그러니 리빙랩을 새로운 과학기술을 적용하려는 테스트 베드쯤으로 여기는 건 옳지 않다.

 

리빙랩을 과학기술의 울타리에 가두는 순간, 리빙랩은 첨단 기술을 가진 기업이나 대학, 국책연구기관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시민은 ‘사용자(User)’라는 틀에 갇히고 만다. 사용자 중심 열린 생태계란 말도 빛을 잃는다. 오늘날의 리빙랩은 ‘사용자가 거주하는 실험실’이 아니라, 시민이 만들어가는 ‘시민 실험실’이어야 한다.

 

‘라이브시티즈(LiveCities)’는 스페인의 ‘바로셀로나 연구소(Barcelona Laboratori)’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리빙랩의 새로운 흐름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리빙랩 프로젝트 어워드 2017’에 뽑히진 못했지만 시민의 역할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라이브시티즈’는 도시 문제를 해결할 ‘사회 혁신 크라우드 소싱 플랫폼’을 만들려는 시도다. 시민이 새로운 해법이 담긴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직접 제안하고, 이를 함께 해결할 사람과 자원을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IT가 쓰이긴 하지만 기술은 거들 뿐이다.

 

누군가가 플랫폼에 도전 과제나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다른 이들이 능력과 자원을 보태겠다고 나선다. 이렇게 사람과 자원이 모여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도전 과제를 해결할 이벤트와 워크숍 등이 플랫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공공기관은 시민에게 디지털 역량을 구축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시민의 개입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뒷받침한다.

 

“사람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도전 과제를 함께 풀어가도록 자원과 데이터, 지식을 연결함으로써 혁신의 가치를 높일 디지털 협력 환경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를 ‘혁신 과정의 민주화’라고도 말한다. 이처럼 리빙랩은 사회 혁신이 ‘시민의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리빙랩도 ICT에서 IoT로, 다시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로 새로운 기술이 더해지는 공간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도시 전체로, 사용자에서 시민으로, 과학기술 영역에서 사회의 모든 분야로 그 범위와 대상이 넓어지는 게 아닐까. 물론 리빙랩에 참여하는 시민의 역할도 그만큼 커져야 한다.

 

<모두가 디자인하는 시대>를 쓴 사회혁신 디자인 권위자인 에치오 만치니(Ezio Manzini) 교수는 2016년 인터뷰에서 ”굉장히 ‘기술 중심적’이었던” 초기 미국의 리빙랩과 달리 “지금 유럽의 리빙랩은 새로운 기술의 적용보다는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이해관계자, 특히 최종 사용자가 포함돼있는가, 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이다. 그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스마트 시티를 위해

 

문재인정부가 추진하는 스마트시티 총괄책임자가 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지난 4일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스마트시티는 단순히 첨단기술이 덕지덕지 붙은 테크노피아가 아니”라고 했다.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면서 그는 ‘데이터’를 강조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활동이 만들어내는 데이터를 사물인터넷을 통해 수집하고, 인공지능이 이 데이터를 분석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이들의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스마트시티의 취지”라는 것이다.

 

아마도 앞으로 만들어질 스마트 시티를 똑똑하게 만드는 원천은 그의 말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도시를 만들어가기까지의 과정도 똑똑하려면 데이터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2000년대 초반 MIT 플레이스랩이 오늘날의 리빙랩으로 진화해온 것처럼 말이다.

 

한 가지 더, 오스트리아는 수도 빈(Wien) 외곽에 ‘아스페른(Aspern) 스마트 시티’를 조성하고 있다. 1970년 공항이 폐쇄되면서 한 동안 방치되던 2,400만㎡에 달하는 너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다. 2011년 3월 빈 시는 앞으로 2050년까지 40년간 진행하겠고 밝혔다. 하나의 도시를 만드는 일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문재인정부는 앞으로 5년 안에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 시티를 조성하겠다고 한다. 5년 안에 만들겠다는 건 정말 시민이 바라서일까, 그것부터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