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을 영어로는 “Kill your enemy with kindness.”라고 표현한다는데 앞으로 미국에서는 “미운 대통령 책 한 권 더 준다”로 바뀔 수도 있겠다. 올해 밸런타인데이를 맞은 미국에서는 트럼프에게 책을 보내자는 이색 캠페인이 벌어졌다. 당연히 지지자들이 대통령에게 선물을 보내는 훈훈한 정경은 아니다. 트럼프의 정책 비판자들이 대통령의 무지와 독선을 힐난하면서 제발 책 좀 읽고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소셜 네트워크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백악관을 책으로 묻어버리자”(Bury the White House in books on Valentine’s day!)는 캠페인 제목이 시사하듯, 독서를 통해 트럼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는 기대보다는 비난과 야유, 조롱의 목소리다.

한 쪽 문서에도 도리도리 하는 트럼프

트럼프 이 양반, 도대체 얼마나 책을 읽지 않기에 국민들로부터 이런 수모를 당할까? 외신의 전언을 보면 상상을 넘는 수준인 모양이다. 트럼프는 이미 대통령 취임 전 인터뷰에서 “한 페이지면 될 것을 200페이지에 걸쳐 써 놓은 게(책따위는) 나한테 필요하지 않다”고 독서의 불필요성을 용감하게 드러냈다. 언론인 마이클 울프가 트럼프 주변 인물 200여 명을 인터뷰하여 쓴 화제작 <화염과 분노 : 트럼프 백악관의 내부>에는 트럼프가 독서를 전혀 하지 않으며, 짧은 정책 보고서나 심지어 한 페이지 메모도 읽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여과없이 들춰냈다고 한다.

읽는 것은 지독히 싫어하는 대신 트럼프는 TV를 즐긴다. 하루 평균 4~8시간씩이나 시청한다고 하니, 자연히 드라마에 푹 빠져 살던 우리나라의 한 전직 대통령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TV 드라마를 섭렵하고 평일, 주말 몰아보기는 물론 각 인기 드라마의 남녀 주조연 배역을 환히 꿰었으며 탄핵을 당하고도 집에 IP-TV가 설치되지 않아서 청와대 방 빼는 걸 미루던 ‘그분’은 트럼프와 가히 쌍벽이다.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 박근혜의 대변인을 지낸 전여옥 전 의원은 박근혜의 서재에 증정 도서 외에는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고 뒷담화를 날렸다.

해괴망측한 박근혜의 어법과 정치 행보 사이의 관계를 언어심리학적으로 짚어본 책 <박근혜의 말>은 전여옥의 뒷담화보다 한층 구체적이다. 책의 저자 최종희는 박근혜 자신이 40년 가까이 써온 일기를 검토하여, 그 오랜 세월 동안 읽은 책에 대해 언급한 것은 단 네 차례뿐이라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힌다. 반면 박근혜의 일기장에는 TV 프로그램 시청 소감이 가득하다. 박근혜는 드라마, 다큐멘터리, 뉴스, 어린이 방송, 동물 프로그램, 어학 강좌 등 화면 조정 시간부터 시작해서 방송 종료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거의 모든 장르의 TV 시청을 즐겼다. 이 정도면 즐긴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가히 ‘탐닉’ 또는 ‘중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통과 공감 부재에 독서 통찰력이 더해질 때

대통령의 책에 대한 무관심이나 불쾌감은 도서 정책에도 반영된다. 2006년 12월 독서 문화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독서문화진흥법’이 공포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뒤이은 이명박 정부는 각종 정부 위원회를 정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독서문화 진흥을 담당하는 독서진흥위원회를 없앴다. 박근혜 정권은 진흥을 막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마음에 들지 않는 책과 저자, 출판사, 관련 단체 들을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고 가능하다면 밥줄까지 끊으려 했다.

여기까지 칼럼을 읽은 독자들께서는 혹시 ‘아 역시 대통령이란 모름지기 책 좀 읽어줘야지’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3만여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평생 독서가 습관이었으며, 책을 원없이 읽던 감옥 시절이 그립다고까지 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항상 책을 즐겨 읽고 비서관들에게도 책을 권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비슷한 결에서 지난 19대 대선을 앞두고 출판계에서는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암소는 젖을 만들지 않는가. 만약 트럼프나 박근혜의 아집과 독선, 타인에 대한 공감 부재는 그대로이면서 책에서 얻은 지식과 상대방에 대한 통찰을 마키아벨리처럼 활용하는 능력만 더해진다면? 아찔하지 않은가? 실제로 독재자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상당한 수준의 독서가였다.

책 읽는 대통령을 바라던 시기는 지났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책을 기피하는 대통령도 문제고 대통령이 책에서 터득한 통찰을 삐딱하게 사용해도 문제라면? 답은 간단하다. ‘책 읽는 대통령’을 바랄 게 아니라 시민들이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정상적 국정 운영, 헌법 가치 수호, 민주주의의 증진 같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를 한 정치인이나 일부 정치 집단에게 내맡겨둘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몸으로 다시 확인했다. 독서 역시 마찬가지다. 가급적이면 대통령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지만, 안 읽은들 어떻겠는가. 대통령을 뽑고 감시하는 시민들이 책을 읽으면 그만인 것을.

마침 좋은 소식도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개인의 도서 구입비에 대해 연 100만원까지 소득 공제를 해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제도 시행에 대해 모르고 있다. 소득 공제 해줘봐야 큰 금액은 아니지만 지갑 형편 어려운 사람들에게 책 한두 권쯤 과감히 더 지를 수 있게 해주는 희소식이다.

지구촌 조롱거리 트럼프를 뽑은 후회와 자괴감으로 백악관 출입문을 책으로 봉쇄해버리고 싶은 미국인들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책 읽으라고 강권하는 건 솔직히 낮은 수준이다. 그 단계쯤은 이미 훌쩍 뛰어넘은 성숙한 시민들로서, 우리는 더 이상 책 읽는 대통령을 바라지 말자. 이제 우리가 책을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