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두 가지 노동형태만 있는 줄 알았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안정적이고, 임금도 많고, 적어도 50대까지는 이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막연한 기대감. 또한 갈수록 정규직 취업이 어려워진 노동시장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우월하고, 정상적인 노동이라는 인식.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정규직 노동자 비율보다 훨씬 많은데도 사회는 늘 정규직이 모든 노동의 목표인 것처럼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은 ‘정규직’이 아닌 다른 부류의 노동을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범주로 묶어버리는 효과를 낳았다. 청소년, 청년, 장애인, 여성,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일터에 있지만 이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늘 주변인 취급을 받아왔다. 주변인이기 때문에 불안정한 노동조건을 기꺼이 감수해야하고, 본인의 의지나 체력과 상관없이 휘청거리는 노동판과 함께 출렁이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이 급속도로 출현하게 된 계기는 IMF 이후이다. 노동 유연화와 서비스업의 확대는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기치 아래 이루어졌다. ‘철밥통’, ‘정년보장’이라는 노동환경은 ‘조기은퇴’와 ‘실업자’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노동위기책의 수혜를 받는 대상은 대부분 남성노동자였다. 따라서 노동위기는 남성노동자의 위기에 다름 아니었다. 남성이 생계부양의 의무를 맡아야한다는 인식은 여전히 제도와 문화적 지지를 등에 업은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남성 노동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자들은 ‘임시 노동자’이며, 장기적인 전망보다 단기적인 지원과 성과로만 일터에 투입된다.
일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노동정책은 ‘남성’, ‘정규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그 밖의 노동은 지워져간다. 물론 남성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늘 실업의 위기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경력단절을 경험하고, 청년들은 인턴만 반복하며 경력을 쌓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다. 이미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진입경로가 다르며, 진입 조건도 다르다. 문제는 이들의 사회적 특성을 반영한 노동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의 노동은 과거처럼 하나의 방향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가사노동, 아르바이트, 인턴, 이주노동 등은 모두 처한 상황과 처지가 다르다.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노동권을 주장하기도 어려워졌다. 나의 고용주가 누구인지, 혹은 나는 어떤 회사에서 일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아웃소싱의 연쇄만이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노동자로 인식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일에 대한 나의 고민이 곧 동료의 고민으로 이어지는 연대의 가능성도 희미해졌다. 문제가 발생할 때, 문제제기를 할 대상도 사라지고 협상해야 할 주체도 모습을 감추었다. 가이 스탠딩은 이런 불안정한 노동자의 출현을 ‘프레카리아트’라고 불렀다.
이제 노동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논의해야한다.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모두가 잠재적인 프레카리아트가 되는 상황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일하는 것을 신성하게 여기고, 일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바꿔야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은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 모두 억압한다. 일을 하는 사람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동시에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밥벌이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많은 이들이 과잉노동으로 소진되는 삶을 살더라도, 눈치를 보며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동료에게 업무가 부담되는 것보다 자신이 더 일을 하는 사회이다. 삶에서 일은 일부이지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노동절은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전세계적으로 노동의 의미를 일깨우기 위한 날이다. 올해는 노동절 전후로 비보가 전해졌다. 거제조선소 삼성중공업에서 크레인이 무너져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몇 달 전에는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故 이한빛 PD가 과잉노동과 폭언으로 시달리다 죽었다.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일자리 중심 공약을 보면, 대부분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이 노동자의 삶을 향상시킨다고 여기는 것 같다. 시간제 일자리, 공공근로 등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소득을 보전해주는 방식은 오히려 사람을 평생 일하는 기계로 바라보는 시각을 넘어서지 못한다. 일을 하다가 삶이 소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출산 등으로 휴직을 해야 할 때는 무얼 먹고 살아가야하는가?
노동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는 삶과 휴식이 충분히 보장되어야하는데, 여전히 노동정책은 일을 강요하거나, 강조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일자리 중심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노동을 다시 볼 수 있다. 과거 예비산업군을 양성하고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던 시대는 끝났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일하지 않은 시간에도 굶주림에 대한 걱정 없이, 즐거운 노동을 상상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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