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펀치(555) 세월호의 기억

By | 2018-06-29T17:02:36+00:00 2017.04.12.|

2014년 4월 16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아침 진료를 하고 있었다. 대기실 쪽이 소란해서 나가보니 간호사, 환자 구분 없이 모두들 TV 화면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머나, 어째. 빨리 나와야지.”

“어어, 배가 아까보다 더 기울었어. 사람들은 다 나온 거야?”

2014년 4월 16일, 그 때는 막 9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TV에서는 속보가 이어졌고, 세월호가 약간 기울기 시작한 때부터 조금씩 넘어가는 것까지 생중계되었다. 해경선을 비롯해서 헬기까지 세월호 주변을 맴돌고 있어서 나는 ‘별 문제 없겠지’하고 진료실로 돌아와 일을 계속 했다. 아니나 다를까. 궁금해서 다시 밖으로 나가 TV를 보니 대통령이 특수부대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구조를 하라고 지시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얼마 지나서 “전원 구조”라는 타이틀까지 떴다.

‘그럼 그렇지. 지금이 어느 때인데… 바로 앞바다에서, 그것도 천천히 좌초하는 배에서 인명 구조 하나 제대로 못할라고…’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진료실로 돌아갔다. 아아, 그 때 장면은 내가 본 세월호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이후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배는 거꾸러졌고, 사람들이, 아이들이 저 안에 있다는 사실에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해경은, 특수부대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면 목숨을 걸고 물속에 들어가서 한 명이라도 데리고 나와야 정상 아닌가?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고 하얘지는 느낌으로 정신없이 진료를 했던 것 같다.

뉴스에서는 계속 배 안에 생존자가 있네 없네, 에어 포켓이 있어서 생존자들이 있다면 그 쪽으로 몰려 있을 거라는 둥 온갖 가설들이 나오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소식들로 채워지면서 며칠이 흘렀다. 배는 완전히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물살이 제일 센 곳이니 뭐니, 대조기니 소조기니 하면서 또 시간은 보람 없이 흘렀다.

머나먼 길, 진도체육관에서 제주항까지

일주일이나 지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구조 소식은 없었다. 다만 뉴스 화면들이 바다에서 가족들이 날을 지새우는 진도체육관으로 바뀌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진료 일정을 동료 의사에게 맡기고 진도로 가기로 했다.

배를 두 번 타고 진도에 내려 택시로 팽목항에 갔더니, 가족들은 진도체육관에 모여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차를 타고 그쪽으로 향했다. 체육관 주변에는 물품지원팀부터 의료지원팀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처럼 자원봉사자로 온 의료진들은 체육관에서 국군 의무대와 같은 장소에서 진료했다. 대부분 쌀쌀한 날씨 때문에 감기 환자들이 많았고, 그 외 소화불량, 두통,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분들도 많았다. 거의 다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들이었다. 응급처치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어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간단한 처방과 얘기를 들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체육관 내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거의 미수습자 가족들이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차이가 있을까만 아버지들보다는 어머니들의 충격이 더 커보였다. 진료 장소 앞에 있는 어머니는 하루 종일 누웠다가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먹고는 다시 눕기를 반복하는데, 나는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는 체육관 안은 시끌시끌할 수도 있거늘 정적만이 맴돌았다. 간혹 기침 소리 정도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방송 카메라를 비추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모두 기자들이었고, 누구 하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만큼 체육관 안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애도의 공감대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체육관 입구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물속에서 건져 올린 시신의 명단들이 게재되었다. 그것도 그 많은 아이들 중 하루에 몇 명 정도밖에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새로 시신이 올라왔다고 팽목항에서 연락이 오면 부모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가 실망하고 돌아오기를 수십 차례, 아주 가끔 추가되는 명단에 딸의 이름이 적혀진 것을 보고는 혼절하는 어머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한민국이 증오스러웠지만, 나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좌절하는 시간이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체육관은 자리가 하나 둘씩 비어갔다. 체육관 바닥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시신이 수습될 때마다 주섬주섬 옷가지며 이부자리를 챙기고 돌아가면서 비어있는 곳들이 많아졌다. 그동안 협소한 진료소 탁자에 엎드려 깜박 잠을 자거나 구석에서 쪽잠을 자며 당직을 서던 의료진들은 비어있는 가족들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가족들이 줄어들고 우리의 긴장감도 일상에 젖어 느슨해질 즈음 교대하는 의사들이 도착해서 가족들 상태나 투약 방법 등 인계를 하고는 가방을 들고 다시 찾아왔던 항구로 돌아왔다. 왔던 길로 다시 배를 타고 몇 시간 지나니, 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오고자 했던 제주항이 멀리 보였다. 멀리서 바라보자니 눈물이 나왔다. ‘조금만 더 가면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른 지금, 세월호는 극적으로 올라왔다. 우여곡절 끝에 목포항 육지로 안착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세월호가 좌초된 지 3년만이다. 그동안 우리는 평생에 겪을까 말까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아이들의 바람이었을까? 자신들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대통령과 주변을 에워싸던 무리들이 법의 칼 끝에 서 있게 됐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애도를 표하고, 거리로 나가 외치기도 하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이도 있었다. 누구나 이런 마음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얘들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않으마. 천국에서 잘 지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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