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다음 뉴스펀딩에 올라왔던 박세길의 ‘청년들을 위한 역사는 따로 있다’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현재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부동산’ ‘노동’ ‘정치’ 등의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한국 현대사’ 속에 녹여냈습니다. 많은 분들, 특히 청년 여러분의 일독을 권합니다. (편집자 주)

 

 

들어가기

 1. 우리는 어쩌다가 청년들에게 대단히 가혹한 사회를 만들었나?
2. 2003년, 달콤 쌉싸름한 플라스틱 머니의 유혹
3. 민달팽이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의 동행은 가능한가?
4. 위장취업과 학력세탁의 현대사
5. 왜 청년들은 노동운동 밖으로 밀려 났는가?
6. 투표율 낮다고? 희망은 청년들이다
7.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한국은 청년들에게 유독 가혹한 나라

제목을 보고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한국이 청년들에게 가혹한 나라라니?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국제 통계 지표는 우리나라가 ‘청년들이 살기 힘든 나라’, ‘청년층에게 유독 가혹한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5년 2월 발표한 고용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분기 한국 청년층(15~24세)의 고용률은 26.2%로 조사 대상 33개국 가운데 23위입니다. OECD 평균(39.7%)에 비해 13%포인트나 낮은 수치입니다. 한국보다 청년 고용률이 낮은 국가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대부분 최근 남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한 나라들입니다. 이들 특수 상황인 나라를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은 청년 고용률 최하위권 국가입니다. 그런데, 장년층(55~64세)의 고용률을 살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장년층의 고용률은 65.6%로 상위 9위입니다. 청년과 정반대로 상위권이지요. 게다가 이 고용률은 OECD 평균인 57.5%보다 오히려 8%포인트 이상 높은 것입니다. 이 상반된 결과를 놓고 보면 한국은 ‘장년층에게 관대하고 청년들에게 가혹한 나라’라는 진단이 과장이나 억측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이었을까요? 지난 1997년 당시 통계를 보면 청년층(15~29세) 취업자는 534만 명이고 50~59세 연령층 취업자는 292만 명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청년층이 장년층보다 훨씬 활발하게 일자리를 갖고 일을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014년말에 확인해 보면 이 숫자가 대폭 바뀝니다. 청년 취업자는 387만명으로 줄고 반대로 50대 취업자는 584만 명으로 두 배로 늘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청년들의 일자리가 150만 개 가까이 감소한 것이고 그 자리를 50대 이상이 채운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죠?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된 것이 1997년 외환위기입니다. 이때부터 청년 잔혹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으로 돌려보기로 하지요.

 

박세리의 맨발 투혼과 노사정위원회 협상 타결

당시 분위기를 알기 위해 먼저 1998년 7월 7일로 가보지요.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의 환호 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울려퍼집니다. 제18회 US 여자오픈 결승전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당시 스물한 살인 박세리 선수가 한국 골프 역사상 첫 전미 대회 우승에 도전하고 있네요. 경쟁자인 추아시리폰 선수에 4타차로 밀리고 있던 박세리 선수가 18번 홀에서 친 공이 해저드로 빠집니다. 지켜보는 모두가 ‘우승이 물 건너갔구나’ 느끼는 순간 박세리 선수는 천천히 양말을 벗고 망설임 없이 차가운 해저드 물 속에 발을 딛습니다. 그리고 침착하게 벙커 샷! 극적으로 위기를 탈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서 박세리 선수는 마침내 우승컵을 거머쥡니다. 박세리 선수의 우승은 바로 전해에 발생한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온 국민들을 위로하는 경쾌한 쾌거였습니다. 소설가 유현종은 한 신문에 “국민에게 용기 준 한국의 딸이여” 라는 칼럼을 써서 박세리 선수를 격려했습니다. 이날의 우승이 단순한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로 우리 국민들에게 다가왔던 것이지요. 그만큼 1998년은 외환위기의 여파로 뒤숭숭하고 온 국민이 의기소침해 있던 때입니다.

한해 전인 1997년에 발생한 외환위기는 대한민국 수립 후 처음 겪는 국가 부도 위기였습니다. 한국은행의 외환 잔고가 텅텅 비어서 해외에서 빌린 돈의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지 못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빌려 가까스로 부도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한국은 기업 구조조정을 실시하여 부채를 줄이고 경쟁력을 높이라는 IMF의 주문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요.

IMF의 구조조정 요구를 처리하기 위해 노동자, 사용자, 정부가 한자리에 모인 ‘노사정 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이들 경제 3주체가 한달 넘게 지속해온 협상은 1998년 2월 7일 타결에 이르게 됩니다. 모두 100여개의 과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정리해고의 법제화”였습니다.

노사정 위원회에서 정리해고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급속하게 정리해고와 기업 구조조정에 돌입하게 되고 이로부터 약 15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여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됩니다. 그런데 정리해고는 기업이나 노동자 입장에서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기업으로서는 노조의 반발과 직원들의 사기 저하가 우려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밥그릇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점차 재직 노동자들과 기업들은 묵시적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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