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오리너구리의 박제가 1798년 대영박물관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네발짐승의 몸통에 오리 부리를 접착한 듯 보였지만, 위조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오리 주둥이, 물갈퀴, 비버 꼬리를 가진 이 두더지 같은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 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조지 쇼가 곧바로 분류를 시도했으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에 살며 알을 낳고 젖이 나오지만 젖꼭지가 없는 오리너구리는 조류인가, 양서류인가, 포유류인가? 오리너구리의 분류에 대한 논란의 종지부가 찍힌 때는 1884년으로, 발견이 보고되고 무려 80여 년이 흐른 후였다. 결론은 난생 포유류 혹은 단공(單孔)류. 동물의 분류에 대한 기존의 합의를 해치지 않는 ‘협상의 결과’였다. 분류는 개념화의 방식이므로 ‘이해하기 위해’ 분류에 대한 논란을 이어왔다는 설명은 옳다. 특성상 온전히 조류나 양서류, 포유류로 분류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을 위한 별도의 범주를 포유류 범주 아래 마련하는 합의에 도달하는 데 80년 이상 걸린 오리너구리 이야기에서, 우리의 지각이 생각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배운다.

오리너구리는 오리와 별도의 범주로 분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리너구리라고 불린다. 즉,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오리와 관계가 없다. 아마도 오리의 특징을 지녔으나 오리만큼 친숙하지 않은 이 동물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오리너구리의 입장에서 그 결과는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오리너구리라는 명명이, 오리를 알지만 오리너구리를 모르는 사람은 남기고 오리너구리를 알지만 오리를 모르는 사람은 제거하는 신비한 힘을 가져다준 것이다. 우연히 오리너구리에 대해 듣게 된 사람이 백과사전에서 오리너구리를 찾는다면 주둥이가 오리와 비슷해서 오리너구리라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오리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주둥이가 오리와 비슷하다는 묘사를 ‘이해하기 위해’ 오리 항목을 한 번 더 뒤적여야만 한다. 하지만 단지 오리가 궁금해서 백과사전을 들춰본 사람이 그로 인해 오리너구리를 알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와 같이 명명의 힘은 크다.

노동자가 소비자임을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하다. 뚱딴지같은 오리너구리 타령을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별개의 경제적 행위로 명명되는 노동과 소비는 분리불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정체성만을 의식하고 소비자로서 정체성은 망각하거나, 소비자로 호명된 경제 주체들의 노동자성은 슬그머니 가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오리를 알면 오리너구리도 아는 셈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노동자가 소비자임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약 100년 전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노동사가였던 웹 부부는 임금을 비롯한 모든 일련의 가격이 교섭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교섭사슬(the chain of bargainings)’이라고 불렀다. 그림 1은 웹 부부의 설명에 따라 노동자로부터 소비자까지 이어지는 교섭사슬의 각 국면에서 교섭의 결과로 가격이 결정됨을 나타낸 것이다. 이때 교섭당사자들 간 상대적 힘의 차이는 가격 흥정의 결과를 결정한다. 이러한 힘의 차이를 가져오는 주요한 요인은 자유(freedom)이다.

사슬의 왼쪽은 공급측, 오른쪽은 수요측이다. 생산자는 노동자와 교섭국면에서 수요측이지만 도매상과 교섭국면에서는 공급측이다. 공급이 넘칠 때 수요측은 교섭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힘은 커진다. 최종 수요자인 소비자는 수요를 하지 않을 자유에 의해 가장 큰 힘을 잠재하게 되지만, 최종 공급자인 노동자의 자유도는 (특히 실업자가 존재할 때) 매우 낮다. 따라서 산업시스템 규제가 부재한 경우 공급의 최종 국면에 있는 노동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산업이 나타나 유지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산업을 웹 부부는 기생산업(parasitic trades)이라고 불렀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 이슈가 된 소위 ‘갑을관계’를 웹 부부의 교섭사슬을 수정해서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그림 2의 ‘갑을관계’ 사슬에서 중소기업이나 대기업도 직접 노동자를 고용하기 때문에 실제 그림은 훨씬 복잡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단순하게 묘사한 교섭사슬의 장점은 교섭의 가능성이 양방향으로 펼쳐져 있음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교섭사슬의 가운데에 있는 영세 사업자가 이윤 몫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 몫을 줄일 수도 있지만 기업 납품 단가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몫은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를 낮게 유지하고 소비자로부터 비싼 값을 받을수록 커진다.

교섭전략이 성공하면 교섭의 결과는 교섭사슬 양쪽으로 파생된다. 최종 공급자인 노동자는 일련의 교섭에 의한 파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저임금 위험에서 노동자의 방파제가 되는 산업시스템 규제로 웹 부부는 노동조합과 최저임금제 등을 언급했다. 기업가 개인이 아닌 기업 조직이 강력한 힘을 갖듯이, 노동자 개인은 약해도 노동자 집단은 강할 수 있다. 이는 사슬의 다른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비자 집단은 강력한 힘을 갖지만 소비자 개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소비자를 원자화된 개인으로 호명하는 것은 유효한 교섭전략이 될 수 있다.

소비자 집단이 교섭에서 행사하는 힘은, 과학 용어를 빌려오자면, 일종의 ‘떠오름(emergence)’이다. 노동자나 소비자 개인에게 내재한 듯이 보이지 않는 힘은 집단으로 구성되었을 때에만 홀연히 ‘떠오른다.’ 집단 구성의 방지는 효과적인 떠오름 제거 전략이 된다. 위 교섭사슬에서 최종 수요자인 소비자에게 가장 큰 힘이 잠재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없다면, ‘호갱’이라는 자조적 신조어에 더 공감하고 있다면, 이는 떠오름의 방지 전략이 현실에서 성공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떠오름 제거 전략의 성공은 한국 사회의 빈곤 문제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림 3은 경제학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이 배우게 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경제 순환도(circular-flow diagram)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 하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의 되풀이되는 과정 혹은 구조를 모형화한 것이다. 이 모형에서 경제 주체는 가계와 기업이다. 가계는 (주로는 노동인) 생산요소를 기업에 제공하고 임금 등의 대가를 받는다. 기업은 생산요소를 이용하여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를 가계에 판매한다. 그러므로 화폐와 상품은 가계와 기업 사이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