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야 진짜 돈이다

돌고 돌아야 진짜 돈이다

By | 2014-12-01T17:34:47+00:00 2014.02.11.|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의 작은 섬 마을 코목스 벨리(Comox Valley)에는 ‘공동체의 길(Community Way)’라는 이름의 독특한 화폐(쿠폰) 시스템이 존재한다. 지역 상인과 비영리단체,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운영되는 이 지역화폐 모델은 화폐 발행자가 상인이다. 통상적인 할인쿠폰이 구매자들에게 상품에 대한 가격할인 혜택을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이 화폐는 단순히 판매 활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먼저 이 화폐 발행에 동의하는 지역 상인들이 모여 할인 대상 품목을 정한 후 할인권을 인쇄하여 지역 사회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에게 전달한다. 비영리단체는 수령한 화폐를 가지고 있다가 단체에 기부금을 내거나 자원봉사 활동을 제공한 주민들에게 일종의 ‘답례품’으로 이 화폐를 건네준다. 착한 일을 한 대가로 화폐를 받은 주민은 화폐를 발행한 상점이나 가게에 들러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봉사료를 줄 때 사용한다. 상인들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 단체를 도와주면서도 매상이 늘어서 좋고 비영리단체는 재정구조가 튼실해짐에 따라 기부금 모집에 투입되는 시간이 줄어들어 본래 자신들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 주민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반대급부를 제공받아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지역에서 소비)를 통해 본인 및 지역의 살림살이 경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는 셈이다.

▲ ‘공동체의 길’ 로고 및 화폐 운영구조. ⓒ www.communityway.ca

기부 영수증을 화폐로 사용하는 지역도 있다.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한다’는 이름의 이 영수증 화폐(Earth Rescue Receipt)는 비영리단체가 기부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간이 영수증화폐다. 영수증을 받은 기부자는 지역 내 가맹점에서 실물화폐가 똑같이 사용할 수 있고 이 화폐가 돌고 돌다가 ‘진짜’ 기부를 하고자 하는 이가 발행처(비영리단체)에 영수증을 제출하면 세금 신고 때 절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정식’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해 주는 방식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대안화폐의 종류는 수천 가지에 이르며 우리나라도 대략 10년 전부터 대전, 과천, 성남, 인천, 부산, 서울을 비롯해 전국 단위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협동경제를 기반으로 한 지역화폐들이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형식과 모델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전 우리 조상들이 마을공동체에서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주며 상부상조했던 전통을 되살려 노동에 기초한 상품과 서비스(품)를 교환하는 행위(앗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최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인천시, 제주도, 강원도 등 지역화폐 제도를 도입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랜 경기침체로 인해 지역에 돈이 돌지 않으니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매개수단으로서의 ‘화폐’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성패 여부를 떠나 지방정부의 전통적인 경기부양 정책과 상당히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대안화폐 모델인 렛츠(LETS)를 포함해 지역화폐(Local currency)의 본질은 신뢰 기반의 작은 공동체에서 비자본, 비시장적 교환 방식으로 서로가 가진 상품과 서비스를 나누는 도구라는 점에서 호혜적 거래 관계를 만들어가는 ‘매개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매개물은 실물화폐와 유사한 모양의 종이일 수도 있고 온라인상의 거래계좌일 수도 있고 언급한 사례처럼 현금 영수증도 가능하다. 어떤 도구를 거래 징표로 사용할 것인지는 구성원들이 ‘합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문제는 합의의 범위, 즉 통화 공간(Currency Space)의 크기다. 현재까지 실험된 결과에 따르면, 지역화폐는 호혜적 관계망이 작동되는 곳에서는 유효하지만 이 영역을 넘어서게 될 경우, 구매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화폐가 지닌 도구적 탁월함보다 화폐 유통범위, 즉 ‘공동체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지역화폐의 유효범위가 어디까지인가는 따로 검증된 기준이 없다. 국가나 지역, 마을공동체가 가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국영화폐가 국가라는 영토 안에서 전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발행한 돈을 공용화폐로 쓰기로 한다’는 법적 강제력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화폐 발행의 권한을 국가가 독점하지 않는 구조라면 이 질서는 해체될 것이다) 따라서 지역화폐가 화폐로서의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으려면 국가의 ‘인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법적인 화폐를 유통시킨 죄를 물어 강력한 ‘태클’이 들어오게 되어 있다.

1930년 대공황 시기, 독일 탄광마을의 기적이라 불렸던 슈바넨키르헨의 베라(Wara), 세금부족에 허덕이던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뵈르글(Woergl)을 회생 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노동증서(Labor Certificates) 등 유럽 국가들에서 통용되었던 감가화폐(화폐 유통을 활성화하기 위해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 가치가 줄어들도록 설계된 화폐)들로부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가상화폐 비트코인(bitcoin)에 이르기까지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법정화폐 이외의 화폐 유통을 엄격히 제한해 왔다. 이유는 한 가지다. 이 ‘이상한’ 돈들이 일정 규모 이상 퍼질 경우 화폐 유통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지럽혀지지 않은 ‘정상적인’ 화폐 유통질서란 무엇인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잘 돌아가는 유통질서란 일정한 영역(작은 지역 혹은 국가)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가 화폐라는 운반수단을 통해 막힘없이 활발하게 거래(교환)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일정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P) 및 수량(Q)의 총합이 100이라면 이 값에 상응하는 일정 양의 화폐(M)를 일정한 속도(V)로 유통시키면 된다. (경제학자 사이먼 뉴컴이 정식화한 교환방정식으로 MV=PQ라고 표현됨. 이 방정식을 토대로 현대 화폐이론의 구루라 칭해지는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이 만들어짐) 만일 유통되는 화폐량이 상품과 서비스의 총량보다 많으면 화폐과잉 현상이 생길 것이고 반대로 적으면 화폐가뭄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이 현실에 제대로 적용되려면(정상적인 화폐 유통질서를 유지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총량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지역에서 순환되는 화폐의 양과 속도가 ‘교통체증’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둘 중 어느 것도 담보할 수 없다. 먼저 상품과 서비스의 총량은 ‘측정’하기가 지극히 어려우며, 설사 화폐량을 측정했다 하더라도 유통 과정에서 화폐의 축장기능(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보관함)으로 인해 언제든 교통 정체를 발생시킬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국민경제 안에서 통화 유통의 최종 책임자인 국가가 번번이 통화관리에 실패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금과 화폐의 연결고리(본위제)가 끊어진 이래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 세계경제체제 하에서 끊임없이 통화위기가 반복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최근 발생한 아르헨티나 사례는 지금껏 발생한 수많은 통화관리 실패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국가 또는 그 대리인인 정부가 통화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영국·미국·독일 등 금융 선진국의 지방정부들이 직접 나서서 지역화폐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최근 많은 나라에서 법정통화 이외에 별도의 화폐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여기에는 연원에는 화폐 발행의 독점적 권리를 가진 현 국가 주도 운영시스템만으로는 금융 대기업, 대형 유통업체 등 거대자본들에 의해 자행되는 부(화폐)의 역외유출 현상 및 그로 인한 지역의 ‘돈 가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지역이 궁핍한 이유 가운데 으뜸은 활용할 자원이 없거나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큰 손들에 의해 지역 밖으로 빠져나갔고, 누군가의 은행계좌와 금고에 잠겨 있고, 돈을 수탁한 모 금융기관의 전산망을 타고 원금을 떼이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소수의 돈 많은 누군가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화폐 운영체계로는 이 지독한 돈의 결핍과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다. 지역경제의 주름이 깊어질수록 돈 가뭄은 심해질 것이고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에 대한 갈망은 더 높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및 중앙은행은 지역화폐 제정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역의, 지역에 의한, 지역을 위한 별도의 화폐 운영체계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

지역화폐는 법정화폐 유통이 결핍된 돈의 사각지대를 메꿀 수 있는 훌륭한 파트너(병용화폐)이며, 별도의 재정투자 없이도 지역 내에 잠자고 있는(단지 돈이 없어 거래되지 못한) 많은 유휴자원을 깨워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정책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기업의 약 20%가 사용하는 공인 보완화폐 비어(WIR),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도시를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탈바꿈하는데 기여한 브라질의 꾸리찌바(Curitiba), 돈을 사용하지 않고 묶어두면 손해를 보는 독일 뮌헨의 감가화폐 킴가우어(Chiemgauer), 12개 지역공동체 은행들과 달러화와 교환 협약을 맺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버크셔(Berkshares), 단기간의 급속한 성장으로 최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영국 브리스톨의 파운드화(Bristol Pound) 등이 대표적인 지역화폐 모델들이다. 이 화폐들의 공통점은 돈의 사명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화폐의 기본속성 중 하나인) 교환 매개(Medium of Exchange)에 강조점을 두고 지역공동체 내의 경제적 가치순환을 극대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돈의 축장은 가치의 흐름을 방해하며 돈의 흐름이 빠르면 빠를수록 살림살이 경제는 좋아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인간은 있으되 돈이 부족하니 새로 돈을 만들어 ‘더불어 함께’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누면 될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 미국 매사추세츠주, 지역화폐 버크셔 누리집. ⓒ www.berkshare.org

지역화폐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일부의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왜냐하면 이 화폐가 매개하는 각각의 서비스와 상품들은 모두 실물경제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인간의 노동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화폐 남발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원인 제공자는 오히려 정부와 중앙은행이다. 최악의 인플레이션 사례로 손꼽히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하이퍼 인플레이션(1923년)을 포함해 지난 100년간 발생한 수요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미숙한 관리통화제도 운영 및 그로 인한 과잉 유동성 공급이었다.화폐의 장구한 역사에 비추어볼 때, 지역화폐를 포함한 대안(Alternative) 통화의 실험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것이나 진배없다.

사회적 자본(신뢰)이 미발달된 지역에서는 지역화폐의 씨앗을 뿌리는 것도 쉽지 않고 아무리 탁월한 모델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지역주민들과의 충분한 소통 없이 ‘살포되는’ 돈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백성과 신하의 눈에 그가 왕으로 보이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처럼, 새로운 화폐는 그것이 돈임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풀어야 할 숙제도 많다. 지역화폐 사업은 수익성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운영경비를 해결하는 일이 쉽지 않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가맹점)에는 화폐가 몰리고 그렇지 않는 곳에는 화폐가 아예 돌지 않는 ‘적체’ 현상에 대한 극복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만능에 가까운 법정화폐와 사용처가 제한된 지역화폐 중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지역화폐를 쓰도록 하려면 특별하고 매력적인 효용가치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장치가 시스템 안에 마련되어야 한다. 화폐 설계자의 깊은 안목과 혜안 그리고 창의성이 필요한 주제들이다. 국가화폐가 경쟁 원리와 금융자본의 희소성에 입각하여 상거래를 교환하는 매개물이라면 지역화폐는 풍요로운 지역 자원과 협력 원리에 기초해 공동체적 삶을 회복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지역화폐를 경험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통화 그 자체의 효용보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 이웃과 이웃들 간의 정 같은 인간적인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호혜와 돌봄의 공동체란 필경 이러한 기반 위에서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화폐 렛츠를 창안한 마이클 린튼(Michael Linton)은 ‘화폐란 인간의 노력을 배치하는 정보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 만일 현존하는 화폐 시스템이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 시스템은 망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 자본주의 하에서 이미 신격화된 ‘돈’과 그 돈을 굴리는 운영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할 때다.

모름지기 ‘창조’ 경제의 실천이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화폐 현상을 정상화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것과 같은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닐까.

*본 글은 오마이뉴스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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