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프랑스, 브라질, 아이슬란드의 시민 참여 플랫폼들
대의민주주의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시도 가운데 ‘시민 참여 플랫폼’을 꼽을 수 있다. 아이슬란드의 ‘더 나은 레이캬비크(betrireykjavik.is)’나 브라질의 ‘이 데모크라시아(edemocracia.camara.leg.br)’가 비교적 일찍 문을 연 플랫폼들이다. 이 데모크라시아는 프랑스의 ‘시민과 의회(parlement-et-citoyens.fr)’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국회에 해당하는 국가 입법기관을 견제한다([사회혁신 길찾기⑧] 디지털 사회혁신, 브라질과 프랑스의 디지털 참여 플랫폼 참조).
더 나은 레이캬비크를 비롯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페인의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madrid.es)’나 프랑스 파리의 ‘참여 예산(budgetparticipatif.paris.fr)’은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플랫폼들이다([사회혁신 길찾기⑦] 더 나은 레이캬비크, 디사이드 마드리드, 파리의 참여예산제 참조).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디사이드 마드리드가 가장 많이 알려진 건 아마도 유럽, 그 가운데서도 덩치가 큰 나라인 스페인이 운영하는 플랫폼어서 그렇기도 하고, 15M 운동이라는 거대한 시민 저항 운동이 불러일으킨 정치 혁명과 맞물려 탄생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민 참여 예산제를 구현하려고 만들어진 파리의 참여 예산 플랫폼을 뺀 나머지 플랫폼들은 모두 정책과 법안 제안 기능이 있다. 하지만 정치의 본령 가운데 하나가 자원의 배분인 만큼 예산의 쓰임새를 시민이 정하도록 하는 참여 예산제는 시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무척이나 중요하면서도 구체적인 일이다.
지난 글들에 이어 이번엔 마드리드의 디사이드 마드리드와 파리의 참여 예산 플랫폼의 최근 상황들을 살펴보려 한다.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파리의 ‘참여 예산‘
파리는 마드리드와 더불어 전 세계 지방 정부 가운데 가장 많은 예산을 참여 예산에 쏟아 붓고 있다. 2014년 사회당의 안 이달로(Anne Hidalgo)가 파리의 첫 여성 시장으로 당선된 뒤 2년간의 시범사업을 거쳐 2016년부터 규모를 1억 유로(약 1300억 원)로 늘렸다. 마드리드도 규모는 같지만 시민 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예산(전체 예산을 인구로 나눈 값)은 인구가 90만 명쯤 적은 파리(230만 명)가 더 많다. 파리는 전 세계 대도시들 가운데 시민 한 사람당 배정된 예산이 가장 많다는 점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1억 유로 가운데 1000만 유로(약 127억 원)를 청소년ㆍ교육 예산으로, 3000만 유로(약 380억 원)는 난민이나 노숙자를 비롯한 소외 계층 예산으로 따로 배정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
파리와 마드리드 모두 온라인 플랫폼에만 기대고 있지 않다. 두 도시 모두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도록 오프라인 홍보는 물론, 때마다 토론회를 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투표소를 마련하는 등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시민을 만나려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마드리드는 집으로 투표를 독려하는 우편물도 보낸다.
파리는 투표 기간에 맞춰 오프라인 투표소를 200곳 정도 마련하는데 이 가운데 절반은 자전거에 투표함을 매달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직접 찾아다니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이러한 노력 덕에 오프라인 참여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또 파리는 해마다 3~5월엔 ‘공동 창조’ 과정을 진행한다. 비슷한 의견을 제안한 개인 또는 그룹끼리 모여 구상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그 사이 프로젝트의 수가 줄면서 알맹이는 더 단단해진다. 2016년엔 3200개에 달하던 제안들이 공동 창조 과정을 거치며 219개의 더 크고 단단한 제안들로 합쳐졌다.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제안된 프로젝트가 시 전체 사업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파리의 참여 예산은 시민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제도를 도입한 이듬해인 2015년에 벌써 5000여 개의 아이디어가 제안되었고, 이 가운데 624개가 투표에 부쳐졌다. 최종적으로 파리 성인 인구 230만 명의 3%에 달하는 6만7000명이 투표에 참여해 188개의 프로젝트를 뽑았다.
2016년엔 투표 참여자가 5%인 9만2809명으로 늘었고 3158개의 아이디어 가운데 219개를 뽑았다. 약 6만6000명의 어린이들이 1000만 유로의 교육 예산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기도 했다. 둘을 합치면 2016년 한 해에만 약 15만9000명이 투표에 참여한 셈이다. 3년 만에 400개가 넘는 프로젝트가 시의 예산으로 진행되었거나 되고 있다.
겨우 몇 년 사이 파리의 참여예산제가 이토록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다양하고 폭넓은 시민 참여 체계가 한몫했다. 계층에 맞게 지역마다 촘촘하게 꾸려진 시민 공론 모임과 모두에게 열린 평생 교육의 기회들, 도시 농업과 사회 주택 등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협력 사업들, 행정에 참여하거나 지방의원들을 만날 수 있는 열린 기회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청원을 제기하거나 풀뿌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돕는 갖가지 디지털 툴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참여 예산은 시 정부의 체계와 업무 방식도 크게 바꿨다. 공무원들은 시민의 요구에 더 빨리 반응하게 되었고, 부서 간의 협업도 활발해졌다. 지금까지 실행에 옮겨진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은 어느 한 부서의 의지나 능력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장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과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
‘디사이드 마드리드‘가 그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미래
디사이드 마드리는 해마다 전체 시 예산 45억 유로 가운데 약 2%인 1억 유로(약 1300억 원)의 쓰임새를 시민이 결정하는데, 이 가운데 3000만 유로는 시 전체 사업에, 나머지 7000만 유로는 각 구 별로 배정 한다.
디사이드 마드리드 구축을 주도한 건 파블로 소토(Pablo Soto)다. 그는 유명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20대이던 10여 년 전 개인들끼리 파일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P2P 툴을 개발했다. 한때 전 세계 2500만 명이 그가 개발한 툴로 음악 파일 등을 주고받았고,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워너, 소니 등의 거대 기업들이 그에게 수백만 유로에 달하는 손해 배상을 청구한 일도 있었다. 그는 지금 마드리드 시의회 의원이자 ‘열린 정부’의 수장이다.
파블로 소토는 2019년 1월 영국 BBC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 동안 시민이 보여준 연대의식을 높이 평가하면서, 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쉼터를 제공한 사업과 치매 환자를 위한 돌봄센터 건립 사업 등을 예로 들었다. 피해 여성을 돕는 사업은 2016년 시 전체 사업에서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2018년엔 70개에 달하는 시립 스포츠센터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사업(100만 유로)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공립학교와 문화센터에 무료 음악 교실을 여는 사업(6만 유로)이 그 뒤를 이었다.
디사이드 마드리드에는 현재 약 20만 명이 등록해있는데 이는 16세 이상 인구 270만 명의 10%에 못 미치는 규모다. 그래서 파블로 소토는 ‘관측소(observatory)’라는 새로운 대안을 준비하고 있다. 무작위로 뽑은 57명의 시민으로 구성되는 이 집단은 같은 수의 의원으로 이뤄진 시의회에 시민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임기는 1년이며 전문가들로부터 결정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 받게 된다. 그는 이들이 디사이드 마드리드에 부족한 사회적 다양성을 채워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어진 주제를 깊이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역량만 있다면 무작위로 뽑힌 이들이라도 시민을 대변하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직 관측소의 권한을 비롯한 구체적인 계획이 드러나지 않아서 이 새로운 대안이 얼마만큼의 효과를 거둘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의원과 같은 수로 관측소를 구성하기로 한 만큼 적어도 ‘대조군’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시의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대의기구’로서 얼마나 잘 구성돼있고, 또 얼마나 옳은 결정을 내리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관측소가 내리는 결정과 비교함으로써 말이다. 물론 관측소를 마드리드 시민의 나이, 계층, 성별, 소득과 교육 수준 등을 따져 ‘시민을 닮은’ 대조군으로 잘 꾸렸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제 ‘시민을 대의하는’ 의회는 ‘시민을 닮은’ 관측소와 다른 결정을 내릴 때마다 시민이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 하는 부담을 질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가 내리는 결정들을 떠올려보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지난해 12월 우리 국회는 올해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청년일자리 예산을 비롯한 보건복지고용 예산을 1조 2000억 원 줄이고 사회간접자본(국토 교통 지역개발 등) 예산을 1조 2000억 원 늘렸다. 알다시피 여기엔 이른바 지역구 짬짜미 예산도 들어간다. 대조군이 정말 필요한 건 대한민국 국회다.
파블로 소토는 벌써 33개 나라, 100여 개에 달하는 (지방)정부들이 디사이드 마드리드와 같은 툴을 쓰고 있는 만큼 앞으로 이들을 연결해 지구적 의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디사이드 마드리드가 꿈꾸는 민주주의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참고한 글]
– Cabannes, Y. (2017) Participatory Budgeting in Paris: Act, Reflect, Grow.
– James Badcock. “The digital activist taking politicians out of Madrid politics”. BBC. 20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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