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거의 관용어처럼 쓰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언론에서도 트위터에서도 어스름 저녁 닭갈비 굽는 철판을 둘러싸고 앉은 직장인들의 술자리에서도 정치는 언제나 경멸과 저주와 희화화의 대상일 뿐 감동이나 희망, 기대감, 신선함 따위와는 아예 담을 쌓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지금 가히 역대 최고로 무능한 데다 국민들의 감정을 서슴없이 거스르는 정권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정치 영역에서 견제할 가능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도는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역사교과서 파동을 거치는 동안 29%~50%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는 지지도가 최대 높았을 때조차 간신히 국민 둘 중 하나만이 지지를 했다는 이야기이고 심할 때는 국민 넷 중 세 사람이 대통령과 현 정권의 국정 운영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에 희망이 없다는 것은 이러한 초라한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정권 교체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며 국정 운영 기조가 변화할 어떤 조짐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국이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대통령이 자국의 국민을 IS에 비유해도 집권 여당은 항상 야당의 두 배 가까운 지지율을 철옹성처럼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야권은 국민의 지지를 모으기는커녕 적전 분열만 거듭하며 지리멸렬하는 상황이다.
정치가 일반적 국민의 경제적 처지나 바람과 괴리되어 존재하기는 바다 건너 미국도 마찬가지인줄로만 알았는데, 최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이 시작되면서 한국과는 크게 다른 요소가 하나 부각되었다. 버니 샌더스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의 정치인이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발견’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몰랐을 뿐이지 그는 이미 미국의 현실 정치 무대에서 진보적 지향을 뚜렷이 밝히고 40년 가까이 활동해 왔으며 그 이전 학생운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한 순간도 변함없이 진보 운동에 매진해왔다는 의미이다.
미국은 구 소련과의 냉전의 한 당사자로서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반감이 심한 나라이며 일찍부터 민주 공화 거대 양당 체제가 정치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진보적 세력의 정당 활동 토대가 약하기는 한국 못지않다. 이러한 보수적인 나라에서 민주사회주의자임을 당당히 표방하며 평생 일관된 정치 노선을 걸어온 정치인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잔잔한 화제가 될 만한 사안이었다.
개미군단이 함께 만들고 있는 버니 샌더스 열풍
버니 샌더스가 올해 4월 30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할 때만 해도 그의 경선 참여는 공화당에 트럼프 같은 돌출이 존재하듯이 돌연변이 혹은 아웃사이더 역할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많은 미국 언론이 예측했었다. 출마 선언 직전의 여론조사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율이 61.6퍼센트인데 반해 샌더스는 8.7퍼센트로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불과 5개월 후 두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으며 내년에 민주당의 첫 주별 경선인 코커스와 프라이머리가 열릴 아이오와 주와 뉴햄프셔 주에서는 샌더스가 힐러리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버니 샌더스 돌풍이 거세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나서고 있고 페이스북 좋아요 수는 260만 명을 넘어섰다. 74세의 노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청년들과 온라인 무대에서 힐러리를 비롯한 기성 정치인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샌더스는 민주, 공화 양당에 속하지 않고 40년간 정치를 해온 무소속 정치인으로서 거대 정당의 후원을 받을 처지도 아니며 정치적 압력을 목적으로 하는 대형 민간 정치자금인 슈퍼팩(SUPER PAC)도 거부하고 오로지 시민들이 십시일반 걷어주는 정치자금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빗대어 미국의 래리 데이비드란 코미디언은 “저는 억만장자가 아닌 유일한 후보입니다. 슈퍼팩은 커녕 배낭도 없습니다. 속옷도 한 벌 뿐입니다.”라고 샌더스를 흉내내며 개그를 펼치기도 했다. 버니 샌더스는 자신을 흉내내는 코미디에 대해 “속옷은 충분합니다.”라며 여유있게 웃어넘겼다고 외신은 전한다. 샌더스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그의 선거자금 모금 실적이 이미 과거 민주당 후보 경선 시절 오바마의 선거자금 모금 규모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샌더스에게 선거자금을 기부하는 사람들의 일인당 평균 기부액은 다른 후보의 1/5~1/10 수준에 불과하다. 샌더스 후원자들의 중심이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과 일자리가 불안정한 청년들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미군단을 이루어 자발적으로 그의 선거운동과 선거자금 모집에 참여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샌더스 돌풍은 그 자체로도 신선하고 놀라우며 부러운 일이다. 그러나 부러움을 잠시 눌러두고 정작 한국 정치의 희망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현재의 돌풍보다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기 이전에 버니 샌더스가 걸어온 정치적 이력에 있다. 최근에 출간된 샌더스의 정치 자서전 <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원더박스 간)는 40년에 가까운 샌더스의 정치 활동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정치 역정이 여타 정치인들 특히 한국의 정치인들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기로 하자.
샌더스와 기성 정치의 차이점
우선 샌더스는 40년 동안 단 한번도 정치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시기별로 다양한 정책을 개발하고 그때마다 필요한 입법 활동을 추진했을 뿐,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을 포기하거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샌더스의 정치 기반은 공화당의 아성이라고 일컬어지던 버몬트 주이다. 버몬트 주는 남북전쟁이 벌어진 때부터 무려 100년간 모든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만을 선출해온 한마디로 ‘꼴보수’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 정치 노선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시장과 하원의원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아간 일관성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계파간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정치인들과 확실히 대조되는 것이다.
둘째로 샌더스는 확실히 준비된 정치인이었다. 그가 처음 시장에 당선되었을 때 공화당과 민주당이 점유하고 있는 시의회는 그의 각료 임명권을 모두 거부해버릴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지역 유지들과 기업들도 이 좌파 시장에 대해 잔뜩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샌더스는 시 행정 업무에서는 어떤 관료나 보수 인사들보다 철저히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예산을 절감해냈다. 그가 시장으로 8년을 재직하고 퇴임할 때 벌링턴 시는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환경과 문화 선진 도시로 꼽혔다. 연방의회에 진출했을 때는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을 그때그때 설득하고 견인해 내면서 자신이 추진하는 진보적 정책과 법안들을 통과시켜 나갔다. 그의 사회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버몬트 주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보내거나 민주당이 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 줄 것을 제의한 배경에는 이러한 현실 정치 무대에서의 충분한 경험과 실력, 오랫동안 쌓아온 정치적 제휴와 협력 과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남는다.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정치적 수사나 구호 정도로만 남아 있는 풀뿌리 정치활동이다. 샌더스는 시장 4선, 하원의원 8선을 역임하고 재선 상원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최소 14번의 선거를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대단한 선거운동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샌더스는 버몬트 주의 거의 모든 카운티를 돌아다니며 지역 주민과 토론회를 일년 내내 연다. 이 토론회를 통해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문제점과 지향을 스스로 각성하고 어떤 정책이 필요하며 그것을 추진할 정치인이 누구인지 알게 만든 것이다. 샌더스는 자신의 여러 선거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의 재임 기간에 거의 두 배로 높아진 주민들의 투표율이라고 자서전을 통해 회고한다. 시민들이 자각을 하고 조직화하여 자신들의 의사를 정치를 통해 표출하게 만들면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샌더스는 말한다. 이것이 샌더스가 말하는 정치 혁명의 간단한 요체이다. 너무도 간단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수십년간 펼친 현역 정치인이 한국에는 누가 있을까?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다른 이런 차이점들이 오늘날 버니 샌더스 돌풍의 진원이다. 한 정치인의 진정성과 굴하지 않는 신념 그리고 평생에 걸친 노력을 이제 비로소 미국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진보는 이렇게 어렵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정치인들 또는 진보 정치를 바라는 우리들조차도 이 간결하지만 변함없는 원칙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푸념만 되뇌여온 것은 아닌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댓글 남기기